[중국동포 증언으로 구성한 '밀입국 질식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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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3년만 고생하면 새로 가정도 꾸리고 딸들과 재미있게 살 줄 알았는데…."

어선을 타고 공해를 통해 밀입국하려다 지난 8일 해경에 붙잡힌 중국동포 金만수(31.농업.중국 헤이룽장성)씨는 수장된 일행 생각에 밤새 잠을 설쳤는지 충혈된 눈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金씨가 누나의 전송을 받으며 고향집을 나선 것은 지난달 5일. 두 딸에게는 상하이(上海)로 돈벌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의 인생이 이렇게 오그라들게 된 것은 지난 8월 중순 동네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한국에 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접근한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그에게 '한국행' 의사를 밝혔고 1주일 뒤 40대 초반의 중국인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회색 점퍼를 입고 상하이역 앞에 도착하면 안내자가 찾을테니 6만위안(약 9백만원)은 한국에 안전하게 도착한 뒤 주면 된다."

속옷 등을 넣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기차편으로 이틀 걸려 상하이역에 도착하자 약속대로 40대 남자가 "한국 가는 사람이냐"며 접근해와 닝보(寧波)의 한 여관으로 가라고만 한 뒤 사라졌다.

버스로 네시간 걸려 닝보항 부근의 허름한 여관에 들어서니 이미 중국동포와 중국인 10여명이 먼저 와 있었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사촌이 수장된 중국인 천이첸(21.푸젠성 풍워촌)형제도 있었다.

그리고 10여일을 무작정 대기했다.

지난달 17일 오전 드디어 일행은 여관을 나서 버스편으로 항구에 도착, 20여t짜리 목선에 올랐다. 배에는 또 다른 40여명이 미리 와 대기하고 있었다. 푸젠(福建).헤이룽장(黑龍江).지린(吉林)성 세곳 출신이 대부분이었다.18일 오전 공해상에 이르러 이틀 동안 한국 배가 접근하기를 기다렸으나 허탕치고 다시 닝보항으로 돌아왔다. 10명 단위로 나뉘어 항구 부근 여관에 분산 수용됐다. 기약없는 기다림이 다시 시작됐다.

이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재출항한 것은 지난 1일. 먼젓번 나갈 때와 같은 배로 공해상에 나가 5일을 기다린 뒤 드디어 대한민국 국적 제7태창호와 접선이 이뤄졌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중국 어선이 서치라이트를 세차례 깜박거리자 저쪽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고 접근해 왔다. 그동안 풍랑 때문에 심한 배멀미로 구토.몸살을 하며 초코파이와 물만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등 고생을 한 것도 일단은 가라앉는 듯했다.

6일 낮 태창호로 옮겨탄 뒤 6일 만에 처음으로 밥을 먹었다. 반찬은 김치뿐이었지만 살 것 같았다. 코리안 드림의 첫 장면이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갑판 위에서 자유시간도 주어졌다.7일 오전 10시쯤 완도군 여서도 남서쪽 12마일 해상에 이르자 "어창으로 들어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우리말을 알아들은 金씨 등 중국동포들부터 비교적 넓은 배 뒤편 물탱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었다.뒤처진 중국인 25명은 배 뒷머리 좌현 어구 창고로 들어갔다. 金씨 등 35명이 들어간 물탱크(2.5평)는 덜 닫힌 뚜껑 사이로 공기가 통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체온으로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물병이 한차례 반입돼 목을 축일 수 있었다.

3시간 뒤인 7일 오후 1시쯤 선원들이 어구창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려다 반응이 없자 金씨 등 물탱크에 있던 일행과 함께 이들을 모두 갑판으로 끌어냈다.10여분 동안 인공호흡도 시켰으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金씨 등 생존자 35명은 8일 오전 3시30분쯤 5t급 FRP선으로 옮겨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그마한 섬에 도착하자마자 2명의 선원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불안에 떨던 일행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다 곧바로 경찰에 붙잡혔다.

여수=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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