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좁아터진 인재 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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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누구보다 머리 좋고 논리에 강하며, 민심 동향에 민감한 DJ가 이끄는 집권세력이 오늘날 왜 이렇게 궁지에 몰렸을까.

만성적인 정치.경제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일하게 희망을 걸어온 대북분야마저 지금은 오히려 집권측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용호 게이트니 뭐니 하는 각종 의혹 사건은 정권의 신뢰와 권위를 무너뜨리고 검찰.경찰.국정원.국세청 등 권력 중추기관을 불신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대한민국이 지금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가 하는 아우성이 절로 터질 상황이다.

*** 言路 막히고 민심 못읽어

4.19정신을 떠들며 투기 의혹을 받는 장관이 나오고 동생이 피의자에게서 돈을 받은 검찰총장 밑에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조폭이 나라를 갖고 논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인물들을 기용하고 이런 '판'을 짠 집권세력의 도덕성.경륜을 믿을 수 있을까.

요즘 항간에선 상황이 이처럼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근본 원인이 뭐냐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왕년의 DJ라면 결코 이렇게까지 되도록 방치했을 리 없고 손을 썼어도 진작에 썼을 것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과거 DJ는 탁월한 논리개발과 정치력을 보여줬고, 특히 여론에 민감해 이슈를 선점(先占)해 나가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지경이 되도록 이렇다 할 논리도 정치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여론을 잘 수렴하지 못한다"는 응답이 60%를 넘고, "언로가 막혀 있다"는 비판이 여권 내에서조차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항간에선 DJ가 달라졌다, 왕년의 DJ가 아니라는 소리가 많이 나온다.

일부에선 새삼 그의 노령(老齡)을 들먹이기도 하고, 신문도 직접 읽지 않고 옆에서 읽어준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도 들린다. 그만큼 시국 상황이 심각하니까 상황을 관리하는 DJ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집권측의 '좁아터진 인재풀'에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얼마나 인재풀이 좁은가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 정권에서는 비리 의혹이 터졌다 하면 으레 배후로 지목되는 사람이 K.K씨다. 과거에도 온갖 의혹 사건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동일 지역 동일 인물들이 늘 배후로 의심받는 일은 없었다.

공화당 시절엔 김종필.이후락.김형욱.정일권.박종규… 등 권력의 핵이 다원화돼 있었고 실력자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DJ정권은 거의 '일주(一柱)체제'로 보인다. "배후"하면 다른 사람을 지목할 여지가 없이 특정 지역 특정 인물이 찍히게 돼 있는 것이다.

지난번 당정 인사를 봐도 인재풀이 얼마나 좁은지 알 만하다. 비서실장 출신의 당 대표 후임에 비서실장이 새로 간다. 차관급 수석을 차관으로 내보내고 차관을 수석으로 데려온다. 기존 인물들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꾼다.

오죽하면 국회가 해임건의한 인물을 자리만 바꿔 다시 쓰고 의혹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람, 배신자 소리를 듣는 사람까지 쓸까. 이런 인사로는 국민의 기대감을 모을 수도 없고 대규모로 자주 해도 '쇄신'소리는 듣기 어렵다.

그런 인사의 폐단은 이번 이용호 게이트에서 신물나게 보고 있다. 문제 인물들과 요직 인물들이 모두 한 지역 한 통속으로 서로 해먹고 봐주고 결과적으로 자기네 지역까지 욕보이고 말았다. 서로 빤히 아는 좁은 테두리의 인물들 사이에서 무슨 이견과 토론이 있겠으며 "아니되옵니다"가 나오겠는가.

그러니까 여권 내부에서부터 "권력의 핵이 밖의 사정을 모른다"거나 권력의 사유화(私有化)라는 말이 안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야 국가경영.정국운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좁은 인재풀은 자연히 많은 질시.적대자를 만들게 된다. 나중에 이들이 세력을 잃으면 집단 왕따 현상이 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 人事 일대 결단 필요한 때

늘 쓰던 사람에게서는 늘 나오던 의견밖에 나올 게 없다. 관리해야 할 밖의 상황은 새 의견.새 대책을 요구하는데 기존 얼굴들에서 그런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지금 맞고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책임도 그동안 중용되거나 힘깨나 써온 사람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물론 궁극적으론 그런 인사를 해온 DJ 자신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이 나라가 떠내려 갈 것만 같다. 1년4개월이 짧지만은 않은 세월인데 이런 식으로 보내서야 되겠는가. 아마 인사에 관한 일대 결단이 없고서는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송진혁 <논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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