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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지도 않고 닳지도 않고…엄마, 늙지 않는 스뎅 해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4호 04면

대중목욕탕 안에서 팔순 할머니 두 분과 마흔 줄의 여성이 ‘삼십대 초반의 젊은 것’과 한바탕합니다. 샤워꼭지며 수도꼭지를 있는 대로 틀어놓고 샴푸 거품을 부글부글 비벼올리는 ‘젊은 것’의 행태에 분노한 할머니들이 달려들어 아까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잠갔기 때문이지요.

김성희 기자의 BOOK KEY: 수필 『엄마표 나라』

“할머니들, 왜 시비예요?”라고 요즘 젊은 것이 항변하자 할머니를 모시고 간 마흔줄 딸이 한마디합니다.
“어른들이 물 좀 아껴쓰라는데 뭐 잘못됐나? 요즘 젊은 것들은 말이야, 물 아껴쓸 줄도 모르고 어른 공경할 줄도 모르고 말이야.”
당연히 고운 답이 나올 리 없죠.

“너희들 다 한 패지? 눈 따갑단 말이야, 너나 잘해”라고 달려들자 딸은 욕통물을 그 얼굴에 쫙 끼얹습니다. “너도 잘해”라며.
수필집 『엄마표 나라』(최순애 지음, 해피스토리)에 실린 이야깁니다. 책은 82세 어머니와 사는 42세 딸이 썼는데, 찡하고 짠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열두 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글솜씨를 보면 전혀 평범하지 않은 딸이 경주 최부잣집 막내에게 시집을 와 6남매를 낳고 기른, 평범한 어머니의 말씀을 소재로 엮은 것입니다.

욕탕 사건에도 “물 아껴쓰면 용왕님이 돌아보고, 나무를 아끼면 산신령님이 돌아본다”는 ‘어른 말씀’이 나옵니다. 필자의 엄마와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알뜰함에 의기투합해 성님, 아우님 하다 물 아까운 줄 모르는 요즘 젊은 것에 대해 ‘의거’를 벌인 거죠.

“헌 게 있어야 새 게 있지. 버리는 거 너무 좋아하면 못 쓴다”는 말은 스뎅(스테인리스)그릇 이야기에 나옵니다. 애지중지하는 스뎅그릇을 두고 모녀는 신경전을 벌이죠. 그러다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있잖아, 유 박사(엄마에 대한 애칭)가 스뎅이었음 좋겠어.”
“구질구질하데며, 왜 내다버릴려고?”
“깨지지도 않고, 닳지도 않고, 가꾸면 다시 반짝반짝 예뻐지고…. 엄마, 늙지 않는 스뎅 해라.”

이쯤에서 눈치챈 분도 있겠지만 책에 실린 에피소드는 ‘어른 말씀’에 살을 붙인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책 말미에 ‘엄마표 말씀사전’을 붙였는데 살갑기도 하고 흘려 듣기 힘든 ‘지혜’도 있습니다.
“봄바람은 품 안으로 들어간다”는 한겨울보다 초봄이 더 추우니 멋 부리지 말고 실속 있게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당부하는 말입니다. “머슴 위에 머슴 있다”는 주인이 나서 일해야 아랫사람들이 잘한다는 뜻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속 썩인다고 푸념하는 맏딸에게 이르는 충고입니다.

일찍이 시인 김소월은 ‘초혼(招魂)’이란 시에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노래했습니다. 그가 부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개의 장삼이사들에게 그럴 만한 이름이라면 ‘엄마’가 아닐까 합니다. 말을 배워 처음 하는 말이 바로 ‘엄마’고, 머리가 희끗해져서는 가슴 먹먹하게 부르는 이름이 ‘엄마’일 테니까요.이 책은 그 엄마에 대한 송가(頌歌)입니다. 비록 드러내놓고 하지는 않지만 모녀간에 오가는 웅숭깊은 사랑과 따뜻한 정은 읽는 이를 훈훈하게 합니다.

“혓바닥으로 부모 신발창을 대도 그 은공 다 못 갚는다”란 말도 있다네요. 고리타분한 이야기라 타박하지 말고 어버이날 앞서 한 번 읽어 보기 권합니다. 요즘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는 이야기를 만나는 기쁨도 만만치 않지만 혹 아나요? 자다가 떡이라도 생길지.


경력 27년차 기자로 고려대 초빙교수를 거쳐 출판을 맡고 있다.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 『맛있는 책읽기』등 3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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