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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64>다재다능의 시인 조병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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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10면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후반 사이에 서울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조병화(1921~2003) 시인을 ‘만능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병화는 49년 처음 서울중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때는 일본 도쿄고등사범에서의 전공이었던 물리와 화학을 담당했으나 곧이어 수학과 작문으로 담당 과목을 넓혔고, 50년대 중반 이후 국어교사였던 황순원이 퇴직한 후에는 국어과목까지 떠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영어ㆍ미술 등 다른 과목 담당 교사들이 부득이한 일로 결강하게 됐을 때는 대강에 동원되기도 했으니 그 무렵의 학생들에게 ‘만능’이라 불렸던 것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학교 시절부터 조병화의 다방면에 대한 관심은 그 폭이 넓고 다양했다. 경성사범학교(서울대 사대의 전신) 재학 중에는 럭비부에 들어가 팀이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연속 세 차례나 우승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미술부에서도 활약했다. 전공이 과학이었던 탓에 문학에 대한 관심은 다소 늦은 편이었다. 일본 유학 중 틈틈이 문학 서적을 읽고 시를 습작한 것이 시작이었다. 해방 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모교인 경성사범의 강단에 섰을 때 같은 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던 김기림이 그의 습작시를 읽고 본격적으로 시를 쓸 것을 권유했다. 김기림의 주선으로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선보이며 문단에 데뷔한 것이 49년이었다.

동년배의 다른 시인에 비해 등단이 다소 늦었기 때문인지 조병화의 시 쓰기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등단 이후 그는 매년 평균 한 권의 시집을 내놓았다(우연찮게도 그가 평생 펴낸 시집은 그의 시단 경력과 비슷한 50여 권이었다). 등단한 지 10년, 20년이 지나도 단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70년대에 이르러 그의 시집이 20권을 돌파하게 되자 조병화의 ‘다산성’은 심심치 않게 문인들 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조병화를 일컬어 ‘시를 만드는 기계’라고 빈정대는 문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화두는 대개 ‘시를 너무 쉽게 쓰고 남발하는 나머지 시문학의 격을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해시의 효용성’에 관한 논란도 잦았던 때여서 조병화 시의 옹호론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의 시에 대한 이런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병화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없어도 나는 시를 쓴다’는 어떤 젊은 시인의 말을 되받아 ‘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읽는 시를 쓰겠다’고 공언한 적도 있다. ‘나는 아프면 아플수록,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그리우면 그리울수록, 쓸쓸하면 쓸쓸할수록 더 많은 시를 쓴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사실 조병화의 시는 다작이며 쉽게 읽히기 때문에 평가절하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에 대한 비판에 늘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시를 악평한 일로 해서 그와 사이가 틀어진 문인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조병화는 인간성의 본바탕이 다정다감하고 매사에 분명한 사람이었다.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는 늘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다니는 멋쟁이이기도 했다. 그가 동석한 문인들의 술자리에서 술값은 대개 그의 몫이었고, 어려움에 빠진 문인들을 남모르게 도와준 일도 많았다. 황동규ㆍ마종기ㆍ장윤우ㆍ김광규 등 서울고교 시절의 시인 제자들은 물론 경희대ㆍ인하대 재직 시절의 수많은 문인 제자도 이런 조병화를 좋아했다. 특히 60년대 후반의 경희대 국문과 교수 시절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조태일을 직접 총장실로 데려가 장학금을 받게 해 준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우리 문단에서 가장 많은 문학상과 훈장을 받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한국시인협회장·예술원 회장 등 주요 예술단체의 수장을 역임했던 점도, 두 개 대학 부총장을 거쳤던 점도 그의 그런 호인 기질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80년 제5공화국 출범 때 ‘전두환 찬양시’ 집필에 ‘동원’된 것도 그의 호인 기질이 작용한 탓으로 보면 그런 기질을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병화는 평생 50여 권의 시집을 포함, 에세이집ㆍ시화집 등 모두 16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그림 전시회도 10여 차례 열었다. 2000년 그는 팔순을 맞아 50번째 시집 '고요한 귀향'을 펴내면서 ‘꿈의 귀향’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썼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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