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댄스 개막작 스페인 영화 '마리포사'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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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광기(狂氣). 그것은 개인적 관점에서 볼 때 득(得)이 될 수 있다. 천재의 광기는 세상의 관습.부조리를 타파하는 에너지가 된다. 그러나 사회.역사적 시각에선 해(害)가 될 위험성도 크다.

이념.정치와 연결될 땐 더욱 그렇다. 아무리 이념의 순수성을 앞세우더라도 타인을 배제하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면 비극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요즘의 핫 이슈인 미국 테러사건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인류의 지난 궤적은 이런 이념, 혹은 신념의 절대성이 빚어낸 크고 작은 비극들로 점철됐다.

세계대전과 각종 내전으로 피를 흘렸던 20세기는 더욱 심각했다. 영국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 라고까지 명명했다.

문제는 이런 대립이 국가.민족 등 거창한, 나아가 추상적인 단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진정한 피해자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민초들일 것이다. 개인적 의지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시대의 광기나 갈등에 짓눌려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잃어버리는, 그런 것이 더욱 처참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스페인 영화 '마리포사' (호세 루이스 쿠에르다 감독)는 이런 개인과 사회, 개인과 시대의 모순에 주목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반세기 전 한국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첨예한 대립 사이에서 반목하다 결국은 이웃을 여론재판으로 단죄했던 우리의 불행했던 현대사를 곱씹게 한다.

영화에서 여덟살 꼬마 몬초(마누엘 로자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가는 선생님 그레고리오(페르난도 페르난 고메즈)에게 돌팔매질을 한다. "빨갱이, 무신론자, 나쁜 놈" 이란 욕설과 함께….

그런데 이것이 자발적 행동이 아니라는 데 비극성이 배가된다. 한때 공화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전력을 숨기려고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그런 말을 강요했던 것. 프랑코 장군으로 상징되는 파시스트적 국가주의자가 세력을 잡자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으로 아이까지 동원한 것이다.

영화를 이해하려면 역사적 지식이 필요하다. 1930년대 중반 가톨릭.군부세력.지주.기업가 중심의 국가주의자와 노동자.농민.지식층 중심의 공화주의자가 격렬하게 맞붙었던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 가 형상화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레고리오는 몬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현인과 같은 인물이었다. 천식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학교에 늦게 들어간 몬초를 따뜻하게 보살펴준 친구이자 숲.나무.꽃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참스승이었다. 제목의 마리포사는 스페인어로 나비라는 뜻.

'마리포사' 는 이런 묵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화면은 결코 무겁지 않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종반부의 메시지는 단어 위에 점을 찍는 방점과 같다. 대신 영화의 무대가 된 스페인의 작은 마을인 갈리시아의 수려한 풍경,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그리고 어린 꼬마가 세상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어린 아이의 성장기라는 익숙한 형식을 빌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빠뜨리지 않고 전달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99년 선댄스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호평을 받았다. 다만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02-766-3390, 내선 293) 한 곳에서만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6일 개봉.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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