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스티브 라이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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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73년 1월 18일, 뉴욕의 전통 깊은 클래식 연주장 카네기홀에서는 연주 도중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네 대의 오르간' 이 연주되던 날의 사건이었다.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 소리는 사실 연주를 중단시키기 위해,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그만 끝내라는 아우성이었다.

36년 카네기홀이 있는 뉴욕에서 변호사 아버지와 브로드웨이 가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라이히는 지난 1천9백년 동안의 서구음악 전통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미니멀리즘' 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어느 시대나 기존 체계에 대한 부정을 통해 새로운 작곡가가 태어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특히 20세기의 아방가르드(전위) 작곡가들은 전통에 대한 거부를 즐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라이히가 이런 인물들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그의 부정의 방식에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작곡가들은 자기네들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을 거부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부정의 방식은 19세기의 작곡가들이 18세기의 음악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20세기 유럽의 작곡가들이 이전의 고전 음악과 매우 다른 난해한 음악을 작곡했을지언정 그들의 그러한 작곡가관, 또는 미학관은 서구의 전통 속에 놓여있었다.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은 비록 청중이 몇 명 없다고 하더라고 카네기홀에서 야유를 받는 음악은 아니었다. 난해한 아방가르드의 음악까지 잘 참고 들었던 클래식 연주회장의 청중이 라이히의 음악을 거부한 것은 전통에 대한 그의 도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라이히의 음악은 간단히 말해서 반복의 음악이다. 서양음악에서 반복은 사실 음악 구조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라이히는 이를 음악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부로 확대했다. 그의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같은 소리가 반복되는 지루한 음악이라는 인상을 갖기 쉽다. 바로 이런 점이 그날 카네기홀에 모였던 청중들을 화나게 했던 것이다.

*** 서양음악 전통 정면 도전

이 당시 미국의 현대음악계는 엘리엇 카터를 대표로 하는 난해한 음악과 존 케이지를 대표로 하는 아방가르드 계열이 지배하고 있었다.

즉, 난해하고 복잡한 반음계음을 주로 사용하여 고전주의 조성(調性)음악에 길들여져 있던 일반 클래식 청중들을 교육시키려는 작곡가들과 아예 음악을 버리고 퍼포먼스와 즉흥연주로 역시 관객을 교육시키려는 작곡가들이 모두 뉴욕의 맨해튼에 모여있었다.

난해한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귀에는 라이히의 음악이 단순한 반복에 의존하고 있어서 지루할지는 몰라도 난해하지 않은 음악이었다.

전위음악가의 눈에는 지나치게 쉬운 음악 요소로 대중적 취향에 영합하는 '불건전한' 작품으로 보였으며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예술의 고고함이나 순수함, 진지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전통적인 서구 예술음악의 작곡 방식과 전위음악을 정면으로 도전한 그의 작품은 클래식 연주회장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가들이 모인 화랑에서 인기를 끈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 드럼.대형앰프… 록그룹 방불

처음부터 기존의 현대음악계와 가까이 지낼 수 없었던 그는 완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생존해야 했다. 택시 기사.이삿짐센터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를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이 모여있던 뉴욕의 소호는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갤러리 콘서트를 준비하기 위해 라이히는 몇몇 동료 연주자들을 모아 '라이히와 그의 연주자들' 이라는 그룹을 만들었고 이들의 악기 구성은 클래식보다는 록음악에 더 가까웠다. 드럼과 신시사이저.색소폰, 그리고 대형 앰프와 스피커 등을 늘어 놓고 연주하는 모습은 록 그룹의 콘서트를 방불케했다.

일반 현대음악 작곡가와는 달리 라이히는 자신과 그의 친구들을 위해 작곡했고 이들은 이 작품을 들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벌였다. 미국보다는 유럽, 특히 독일이 라이히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이들은 일반 록그룹처럼 유럽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라이히에게 변화가 찾아 온 것은 1976년 그의 대표작인 '18인의 연주자를 위한 음악' 이 뉴욕에서 초연되면서부터다.

이때까지 그를 철저하게 외면했던 기존의 작곡계, 특히 미국의 작곡계를 비롯하여 평론가와 일반 클래식 청중들이 이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물론 많은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그래도 라이히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지만, '18인의 연주자를 위한 음악' 은 미국의 ECM 음반사에서 78년에 출반되었고 곧바로 2만장이나 팔리는 현대음악계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곡이 알려지면서 주요 오케스트라와 단체로부터 작품 위촉이 이어졌고 80년 2월 약 7년 전에 야유를 받았던 바로 그 카네기홀에서 열린 그의 작품 발표회는 전체 좌석이 매진되는 경이로운 일이 일어났다. 뉴욕 다운타운의 이삿짐 센터에서 그의 동료 미니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와 함께 일하면서 작곡가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그가 이제 뉴욕의 업타운 클래식 음악계의 주목받는 대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어느 미니멀리즘 전문 평론가는 이 때를 기점으로 라이히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 필립 글래스의 음악에서 진정한 의미의 미니멀리즘을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는 그만큼 이들의 음악이 기존 클래식 음악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런 지적의 옳고 그름을 떠나 라이히 작품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바야흐로 진지한 예술과 가벼운 대중 문화 사이의 장벽 자체가 의심을 받는 현 시점에서 보면 라이히는 크로스오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크로스오버는 한 장르의 음악인이 주로 연주가가 다른 장르의 음악에서 성공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라이히는 장르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곡가이며 연주자로 예술과 대중음악의 특징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 "대중 영합" 처음엔 외면당해

결과적으로 그의 음악은 두 분야의 음악 모두에 영향을 끼쳤다.

후배 미니멀리즘 작곡가들은 그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룹을 만들어 대중음악의 악기를 과감하게 사용하는 한편 영국의 그룹 오브(The Orb)는 라이히의 작품을 샘플링하여 인용하였으며 90년대 테크노 음악의 대표적인 인물들인 콜드컷과 켄 이시이.디제이 스푸키는 라이히의 작품을 리믹스해서 음반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양 진영 모두를 포함하여 젊은 진보적인 음악인들이 라이히의 음악에서 미래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음악학

*** 스티브 라이히는…

▶1936년 미국 뉴욕 출생

▶53년 코넬대에서 철학 전공

▶57년 하버드대 철학대학원 입학을 거절하고 작곡 공부를 시작함

▶58~61년 뉴욕 줄리아드 음대와 샌프란시스코 밀즈대에서 작곡 공부

▶64년 첫 미니멀니즘 작품 '비가 내리리라' 작곡

▶67년 뉴욕의 파크 플레이스 갤러리에서 작품 발표회. 이 연주회를 통해 미니멀리즘 미술가들과 동료 작곡가 필립 글래스를 만남

▶70~71년 가나에서 아프리카 음악 공부

▶71년 초기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표작 '드러밍' 을 현대미술관(MoMA)에서 초연

▶73~74년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음악 가믈란 공부

▶74년 비디오 아티스트 베릴 코롯과 재혼

▶76년 대표작 '18인의 연주자를 위한 음악' 작곡

▶77년 부인과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 유대교의 성전 낭송법을 공부

▶81년 유대교 영향의 작품의 출발점인 '테힐림' 작곡

▶88년 크로노스 현악4중주단의 초연으로 '다른 기차들' 발표

▶93년 부인과의 첫 공동 작품으로 무대음악 '동굴' 발표

▶97 부인과의 공동 작품으로 3부작 '세개의 이야기' 작곡 착수, 현재 1부만 완성.

▶2001 '뮤지컬 아메리카' 선정 올해의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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