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학생 “처음으로 나라 생각하게 됐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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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 상병의 사진을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다음 조지훈 상병 사진을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장철희 일병, 정범구 상병, 김선호 상병…. ‘대한민국 해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사진마다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그렇게 46용사의 얼굴에 묻은 차가운 빗방울을 하나하나 맨손으로 닦아냈다.

그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때론 긴 한숨을 쉬었다. 이창기 준위의 얼굴까지 모두 닦은 후에도 그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광장을 서성이며 사진에 맺히는 빗방울을 닦고 또 닦았다. 분향소는 자정에 문을 닫는다. 광장을 떠나던 그가 뒤를 돌아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지하철 시청역 6번 출구로 그가 사라질 때까지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광장은 추웠다. 28일 오후 10시30분, 김화영(34·여)씨는 돌쟁이 아들 장선욱군을 담요로 싸 안고 조문하러 왔다. “아기가 감기 걸릴까 걱정도 됐지만 우리 가족 같아서요….” 말할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보였다. 김씨는 맞벌이 부부라 밤에야 겨우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낮에 아이를 보느라 조문을 못했다는 시어머니(60)도 함께 왔다.

오후 10시45분. 고교 동창인 회사원 곽민경(25)·김민지(26)씨는 코가 빨개지도록 엉엉 울었다. 곽씨의 동생은 지난달 8일 해군에 입대했다. 김씨의 동생은 육군 상병이다.

오후 11시15분. 베트남전 상이용사 조양호(65)씨는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분향소에 왔다. 곧 넘어질 듯,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그는 “이렇게라도 안 하면 못 보내겠다”며 수첩에 전사자들의 이름과 계급, 나이를 적었다.

‘0:00’. 서울광장의 전광판 시계가 자정을 알리자 분향소를 지키던 해군 장병들이 46명의 용사들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다음 날 오전 1시. 분향소의 불은 꺼졌다. 하지만 추모 쪽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사자들의 사진 앞을 시민들은 떠나지 않았다. 중절모를 쓴 노신사, 검은 넥타이를 매고 온 30대 회사원, 긴 머리 여대생…. 밤이 이슥하도록 발걸음이 이어졌다.

영결식이 열린 29일. 햇살이 화창했다. 언제 비바람이 몰아쳤나 싶었다. 시민들은 마지막 인사를 하러 분향소를 찾았다. 해군 중위 출신인 정호균(41·공무원)씨는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그는 급성신우염으로 17일 동안 입원했다가 이날 퇴원했다.

백발의 김용희(83) 할머니는 경기도 양주군 덕정리에서 먼 길을 왔다. 검은 윗도리와 치마, 흰 블라우스를 갖춰 입었다. 할머니는 고 한주호 준위의 영정 사진을 어루만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일제시대도, 6·25도 겪었지만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교복 차림의 심기석(관악고 3학년)군은 “천안함 용사들을 보고 처음으로 나라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며 홀로 분향소를 찾았다. 심군이 바라보던 게시판엔 ‘나라 사랑하는 그 마음 남아있는 우리들이 끝까지 지켜 나가겠습니다’라고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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