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 희미한 손가락, 분명한 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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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왜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는가. " 지금 미국이 말려들고 있는 또 한 차례 중동전쟁에는 희미한 손가락들이 너무나 많다. 미국을 습격한 테러집단, 그 주모 또는 비호국가, 문명 충돌론…. 그러나 이런 손가락들이 아니라 달, 즉 전쟁의 제1 원인을 곧장 보라고 선(禪)불교의 이 할(喝)은 다그친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다이하드' 에 나오는 악당들은 자기네들이 고상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테러범인임을 가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노린 것은 그들이 점령한 일본계 회사 빌딩의 지하금고에 있는 현금과 증권이었다. 2차 세계대전은 자원전쟁이었다. 3차 세계대전은 이데올로기 전쟁일 것이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일어 날 것이라던 예언은 빗나갔다.

*** 석유 때문에 벌이는 전쟁

중동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제1 원인이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지 몰라도 아직은 석유라는 자원이지 종교나 민족이 아니다.

빈 라덴의 목표도 석유 수입금을 전횡하여 자기네 일족의 부패하고 사치한 생활에 낭비하는 아랍제국의 왕족정권을 전복하고 석유에 관한 지배권을 이슬람 원리주의 와하브(Wahhab)파가 차지하려는 데 있다.

사담 후세인이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침략.합병했을 때도 명분은 아랍 민족주의였지만 실은 석유 때문이었다.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이 걸프전에서 이라크와 싸운 것도 석유 때문이었지 쿠웨이트의 독립을 회복해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이 지난 11일 미국을 공격한 까닭은 미국이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기존 거래상대인 이들 부패한 왕족정권을 비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극단적 테러공격을 계속 감행하면 미국이 굴복하고 중동에서 물러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네가 석유를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 총 석유수출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중동석유는 세계 경제의 생사를 쥐고 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이번에도 역시 석유 때문에 이 전쟁을 피할 수 없고 져서는 안되는 것으로 각오하고 있다.

중동인민들의 석유자원 주권과 석유 에너지에 의존하는 현 세계경제의 생산방식이 여기에서 현실적으로 충돌한다. 모든 에너지 수입국가는 이번 전쟁과 관련하여 이 점을 드러내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미국은 자기네가 테러 공격의 피해자임과 이번 전쟁이 자위권의 발동임을 강조할 뿐이다. 그러나 그 뒤에 석유라는 제1 원인이 있음을 알면 미국과 그 맹방이 왜 이번 전쟁에서 세계를 동맹군 아니면 적, 이렇게 흑백론적 양분법으로 나누는 것으로 일척건곤(一擲乾坤)의 배수진을 삼는지도 알 수 있다.

이 전쟁의 가능한 결말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가 중요하다. 한국은 미국에 얄미운 뺀질이 노릇만 하고 이 전쟁에서 실제로는 빠진다고 치자.

첫째는 전쟁이 소규모로 단기간 진행되다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나고 중동의 석유공급은 종전처럼 계속되는 것.

둘째는 전쟁이 중동 전역에 확산하여 대규모로 장기간 끈 후 미국과 그 동맹국의 승리로 끝나는 것(그렇게 되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동에서 왕정을 걷어내고 민주국가들을 세우려 할 것이다).

셋째는 둘째와는 반대로 테러집단과 그 비호국의 승리로 끝나는 것.

*** 경제 궤멸.기근 올 수도

첫째의 경우가 실현되면 아무쪽도 한국에 특별한 보복을 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둘째 경우가 실현되면 미국은 한국을 동맹국에서 제외하려 할 것이다.

지금 벌써 미국의 어떤 논평가들은 이 전쟁에서 미국의 맹방으로 아시아에서는 대만과 일본만을 거명하고 한국을 제외하고 있다. 셋째 경우가 실현되면 한국은 석유 수입선이 끊기는 것은 물론 미국의 적국이 되어 식량 무기화 대상국이 될 가능성도 있다.

석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국내총생산 1단위당 석유 의존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인 우리가 중동 인민의 정의를 위해 나라 경제의 총체적 궤멸을 참아낼 전 국민적 각오가 되어 있는지 참전 찬반에 관한 여론조사라면 마땅히 이것을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는 총 곡물수요(사료곡물 포함) 가운데 겨우 25%만을 국내생산으로 메운다. 한국의 전 산업은 궤멸되고 전 인민이 기근에 빠질 수도 있다.

강위석 <월간 emerge새천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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