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당선작 '순정한 허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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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3면

소설은 살아 움직인다. 서사 양식이 쌓아온 다양한 언술 방식을 자신의 형식 속에 흡수하며 발전해 온 소설은 디지털의 물결 속에서도 거침없이 자기변신의 드라마를 펼쳐 보인다.

아날로그의 적자(嫡子)인 소설은 '단절과 계승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을 연주하며 디지털 문화에 접속한다.

디지털 언어의 이념은 연결(connection)이다. 다양한 정보는 선택을 통해 결합된다. 그러나 기억의 내면성을 기계적 장치로 대체하는 전자 언어의 결합에는 필연적으로 선형성, 규율성, 위계질서적 통제와 관련된 아날로그적 원리가 개입한다.

소설은 이러한 디지털 언어의 사회.문화적 함의를 반성적으로 성찰함과 동시에 아날로그적 담론의 경직된 육체를 유순하게 한다.

아날로그는 디지털의 시점에서 반추되고 있으며, 디지털은 아날로그와의 연관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서로는 경계를 넘어 스미고 짜인다. 소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표상하는 이질적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동시대의 문화적 풍경을 압축.재현함으로써 여전히 자기변신에 골몰하고 있다.

성석제의 글쓰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잇는 가교(架橋)가 되기를 꿈꾼다. 아날로그에서 출발한 서사 양식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가 농담에 바탕한 구술담론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는 결절점(結節點)에서 그의 소설은 디지털 문화와의 'ON/OFF' 를 반복하고 있다.

성석제는 소설의 실체를 지우면서 그것의 흔적을 환기한다. 그의 글쓰기에서 '소설' 의 실체는 끝없이 미끄러진다.

'소설' 은 '소설 이전 혹은 소설 이후' 의 그 무엇에 의해 '타자화(他者化)' 된다. 그는 이 부재의 흔적을 통해 다시 '소설' 을 소환한다.

이러한 '타자화' 는 소설의 죽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소설의 부활을 유추하는 각주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의 글쓰기는 소설을 전복시키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안정성을 도모하는 작업, 즉 소설을 죽임으로써 되살아나게 하는 방법에 대한 탐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설' 의 본질에 대한 탐색은 '희극성의 미학' 을 통해 구술문화와 만난다. 성석제는 서구와 동양의 고전 서사 양식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근대의 동일성(identity) 담론을 유쾌하게 탈주한다.

그는 '쓰기' 의 동일성 담론을 탈주하기 위해, 문자의 세계로 옮겨오기 전,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던 '날개 돋친 말' 을 응시한다. 현실의 코드에서 이탈한 상상.허구의 세계가 구술문화의 전통과 만나는 순간, 문자 문화의 동일성 담론에 마비된 감각이 자유를 얻어 비상한다.

근대 서사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구술언어는 디지털 문화의 출현이라는 조건 속에서 새롭게 맥락화된다.

구술언어의 원심력은 이질적인 요소의 갈등.병존.접합을 용인하면서 스스로를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리, 즉 타자성(alterity)에 의한 자기비판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문화의 전망과 통한다.

소설의 실체를 지우면서 다시 소설로 귀환하는 성석제의 탐색은 아날로그의 진지함과 디지털의 속도를 겸비한 새로운 서사를 지향한다.

그는 시.짧은 소설(엽편소설).단편소설.중편소설.장편소설 등의 장르를 가볍게 넘나드는 한편, 시골/도시, 성(聖)/속(俗), 구술문화/문자문화, 허구/사실, 자연/문명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소설' 의 영역을 확장한다.

성석제의 글쓰기는 디지털의 텃밭에서 아날로그를 일구는 작업이다. '경쾌한 희극성' 과 '유희성의 충동' 에 바탕하여 소설이라는 양식이 가진 유연성을 극한으로까지 밀고간 성석제의 글쓰기는 디지털 문화와의 '접속/단절' 을 통해 새로운 서사의 징후를 보여준다.

성석제 소설의 '희극성/유희성' 은 디지털 문화의 속도를 반영한다. 그는 경쾌하고 가볍게 그리고 빠르게 근대 동일성 담론을 탈주한다. 이 탈주의 유희는 '아무 이유 없이, 순전히 재미를 위해' 말들을 서로 대화하도록 열어둔다.

말장난은 언어에서의 순간적인 방심상태, 즉 언어와 대상을 내적으로 조화시킨 상태인 교훈적인 비유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뒤집는 언어의 태만을 드러낸다.

그는 일반적인 견해를 역설로 뒤집거나, 상투적인 문자를 활용하여 통속성을 비판하기도 하며, 또는 관용구나 속담을 우스꽝스럽게 개작함으로써 이성과 감성의 끈, 정신과 몸의 긴장을 느슨하게 한다.

의식을 제압하는 몸의 이미지, 내용을 능가하려는 형식, 원전에 트집을 잡는 패러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수단이 목적을, 형식이 내용을, 상상력이 현실을 대신하게 되면 웃음이 발생한다.

이 웃음의 경쾌함에는 지금까지 성석제가 거쳐온 글쓰기의 흔적, 즉 소설에 대한 자의식과 '희극성/유희성' 에의 충동 사이의 고투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디지털 문화의 가벼움이 아날로그적 삶의 진지함을 둘러싸고 있는 실루엣, 이 실루엣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진부한 현실과 아직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새로움 사이에서 소설의 다양한 가능성을 투영하고 있다.

성석제의 소설은 경쾌하고 발랄한 이야기의 만화경에 녹아든 휴머니즘의 입김을 통해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냉소적이고 풍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웃음에 동화적 순진무구함과 낙관적 달관에 바탕한 삶의 여유를 담고 있다.

이제 그의 소설은 끝없이 이어지는 쓰기와 지우기, 이야기 만들기와 허물기의 반복으로 나타나는 '희극성/유희성' 의 추구와 '지금 여기' 의 삶을 조화시켜야 하는 지점에 도달해 있다.

이러한 과제에 충실히 대면할 때,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성석제의 '너무나 인간적인 웃음' 은 '소설' 의 영역을 사이버 스페이스로까지 확장함과 동시에 가상 세계를 현실 세계의 일부분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이는 디지털 서사의 무한증식에 제동을 걸며, 이에 함몰되지 않고 소설이 살아남기 위한 한 방법이다.

<전문은 '문예중앙' 겨울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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