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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의 소리] 일본식 땅이름 왜 털지못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용산 미군 헬기장을 중지도로 옮길 것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내가 관계하는 모임의 회원들은 아침부터 서로 전화를 거느라 부산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의문의 중심은 헬기장의 이전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중지도' 라는 섬 이름이 문제였다.

몇 년 동안 이 섬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는 중지도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었다. 대신 '노들섬' 이 등장했다. 옳거니!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섬의 이름은 분명히 노들섬이었기 때문이다. 광복 50주년 되던 해에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확정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느닷없이 중지도란 이름이 튀어나와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든 것이다.

'중지도(中之島)' 라는 이름은 엄밀히 말하여 땅이름이 아니다. '가운데의 섬(나카노시마)' 이란 뜻의 일본말이다.

1910년대에 우리 나라를 거저 삼키다시피한 일본은 갖가지 명목으로 곳곳을 뒤지며 이름이 정착되지 않았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산.강.내.섬 등에 자기들 임의대로 이름을 붙였다.

물 가운데의 섬이란 뜻의 중지도니 하중도(河中島)니 하는 식의 이름(실제 이름도 아니지만)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광복 50주년이던 95년엔 어느 해보다 일본 잔재 청산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일본식 땅이름의 정리. 각 자치단체나 해당 지역 지명위원회가 일본식 이름을 찾아 정리해 나갔다. 최종 결정은 중앙지명위원회에서 했다. 무척 많은 일본식 땅 이름을 찾아내 우리 식으로 바꿔 세상에 알렸다.

새로 제작된 지도들이 새 이름으로 하나하나 바뀌기 시작했다. 서울만 해도 인왕산이 仁旺山에서 仁王山으로, 욱천(旭川)은 만초천(蔓草川), 중지도(中之島)는 노들섬이 됐다.

그러나 이런 약속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지켜지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일부 지도는 옛날 일본식 표기 그대로다. 몇 해 전에 필자는 남영역 근처의 한 일터에서 커다랗게 붙여 놓은 '욱천(旭川)정비공사' 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욱천을 만초천으로 고쳐 쓰기로 했으면 만초천 정비공사이지 어떻게 욱천 정비공사인가? 일본 사람 보라고 하는 공사가 아니지 않은가.

일제시대 서울 원효로 일대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자기들 고향에 있는 이름을 따다 붙인 것인데 이것을 정식 이름으로 쓰고 있다니. 관에서는 왜 이것을 네거리에 버젓이 붙여 놓고 공사할 수 있도록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이 땅에는 정리되지 않은 일본식 이름이 무척 많다. 지금 서울에서 명소나 다름없는 인사동(仁寺洞)만 해도 그렇다. 조선시대의 고지도를 보면 인사동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관인방(寬仁坊)과 사동(寺洞)이란 이름이 나온다.

원래는 원각사(圓覺寺)라는 절이 있는 근처 마을이기에 절골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사동이다. 절골의 이웃마을인 탑골(탑동)과 이문골 역시 이 일대에선 잘 알려진 마을이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은 우리부터 일본 냄새를 말끔히 털어내는 것이다. 무조건 남이 쓰니 나도 써도 좋다는 인식부터 버려야 한다.

배우리 <한국 땅이름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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