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죄없는 아프간 양민은 어떡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외신이 전해진 뒤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아졌다. 내 인생을 바꾸게 한, 그 천진한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가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1996년 나는 이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국경을 넘자마자 박격포.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옆의 아프간 사람이 산너머에서 나는 소리라며 안심을 시켰다. 지뢰를 밟아 팔 다리가 잘린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내전 중인 나라에 들어간 것은 그곳을 거쳐야 육로로 러시아까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반군에 총살당할 뻔했지만 나는 아주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됐다.

한 난민촌을 지나던 중이었다. 사람들은 20년 이상 계속된 러시아 침공, 정부군과 반군과의 전쟁 등을 피해 국경근처 난민촌에서 살고 있었다. 외국인, 그것도 동양여자를 보고 호기심 많은 아이 20여명이 몰려들었다.

그들과 손짓발짓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재미있게 놀았다. 남자아이들에게는 태권도 기본동작을 보여주고 여자들에겐 꽃반지를 손가락에 그려주었다. 그들이 학교에 가는 게 꿈이라고 해서 선생님 놀이도 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눈총은 몹시 따가웠다. 외국인과 무슨 '내통' 을 했냐며 탈레반에 추궁받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꼭 살아남아 달라고 마음 속으로 빌며 돌아서는데 누군가 수줍게 빵을 건넸다.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잘려나갔지만 눈알이 머루같이 까맣게 빛나는 여자아이였다.

귀한 양식을 잠깐 놀아준 '친구' 에게 주려는 거였다. 내가 빵을 받아 덥석 베어물으니 다른 아이들이 손뼉치고 어깨를 들썩이며 좋아했다. 그 순결한 함박웃음이라니.

그날 결심했다. 난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특히 어린이들을 위해 나를 아낌없이 쓰겠다고. 지금 바로 그 아이들의 목숨이 풍전등화다. 아프가니스탄은 해발평균 1천m인 산악국가이자 내륙국가다.

한때는 이슬람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지만 현재는 국토가 황폐하고 먹을 물이 거의 말라붙은 상태다. 탈레반의 폭정은 5년 전에도 무시무시했다. 내가 있던 곳에선 여자들이 학교와 직장에 다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흰색 탈레반 군기만 보아도 무릎이 오그라든다고 했다. 늦은 밤, 묵을 곳을 찾지 못해 애쓰는 나를 도와주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서로 수염 쓰다듬는 시늉을 했는데 탈레반이 주위에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표시란다. 얼마 전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집행이 있었다며 몹시 두려워했다.

이들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돼 있다. 지금도 라디오를 듣거나 전화를 걸 수 없다. 외부와의 교류를 일절 금하고 있다니 미국에서 테러가 난 것도, 자기들이 미국의 표적이 된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미국은 철저한 응징을 하겠단다. 물론 표적은 탈레반이라지만 어떻게 총알이 군인들만 맞히겠는가. 무장군인이라고 해봐야 3만명. 초현대식 무기를 갖춘 미군과는 비교도 안된다. 상상만 해도 아프간 양민들의 주검과 피냄새로 몸서리가 난다.

그들은 피난도 갈 수 없는 처지다. 전통적인 우방인 파키스탄이 미국에 적극 협조하기로 하면서 벌써 난민 유입을 막고 있다. 이란 국경에서도 같은 소식이 들린다. 설상가상으로 탈레반은 주민 이탈을 무력으로 막고 있다고 한다.

그럼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꼼짝없이 있는 자리에서 죽어야 하는가. 단지 아프가니스탄 사람으로 태어난 죄만으로 말이다. 우리가 그토록 부르짖는 인권의 보편적 가치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한비야 오지 여행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