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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카서스 벨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외교용어 가운데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들이 많다.

법률용어에 한자어가 많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주재국 정부가 기피하는 외교관을 가리키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가 그렇고, 일시적 타협이나 잠정협정을 뜻하는 '모더스 비벤디(modus vivendi)' 도 라틴어다.

전장(戰場)의 피비린내를 고상한 문자로 분식(粉飾)하기 위함이었는지 특히 전쟁과 관련한 외교용어들은 대부분 라틴어다.

최후통첩은 '얼티메이텀(ultimatum)' , 정당한 전쟁은 '벨럼 저스텀(bellum justum)' , 합법적 전쟁은 '벨럼 레갈레(bellum legale)' 다.

개전(開戰) 사유는 '카서스 벨리(casus belli)' 라고 한다.

인류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가 말한 대로 전쟁과 전쟁 사이에 낀 잠깐의 평화, 그것이 역사인지도 모른다.

멀리는 트로이 전쟁과 페르시아 전쟁에서 십자군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아편전쟁.남북전쟁을 거쳐 가깝게는 양차 세계대전과 한국전.베트남전.걸프전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전쟁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을 때의 싸움은 정당하고, 무기 이외의 희망이 없을 때는 무기 또한 신성하다" 는 마키아벨리의 말도 있지만 전쟁은 논리가 막다른 길목에 이르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시작된다. 그래서 라틴어로 전쟁은 '얼티머 라시오 레검(ultima ratio regum)' , 즉 왕들의 최후논리다.

역사가 전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카서스 벨리, 즉 개전을 선포하는 명분에 달려있다. 피를 담보로 한 것이 전쟁인 만큼 전쟁치고 명분 없는 전쟁은 없다. 명분이 정당하면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의의 전쟁이 된다.

한편에서는 정당한 전쟁이 반대편에서는 부당한 전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전쟁의 역설이다. 기독교도들이 보기에 십자군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지만 이슬람교도들의 눈에는 추악한 전쟁이었다.

그 어떤 전쟁에서도 피는 피를 불러온다. 전쟁이 시작되면 명분은 자취를 감추고 오로지 승리가 정의를 대신할 뿐이다.

불의의 테러로 일시에 수만명의 무고한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충분한 카서스 벨리다. 미국이 곧 개전을 선포할 태세다.

뉴테러리즘을 상대로 한 21세기의 전쟁은 적이 분명한 열전도 아니고, 냉전도 아닌 회색전쟁이다. 얼굴 없는 적을 향한 미국의 전쟁을 후세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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