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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람] 김혜정 경희대 교수, 2005년 초 지도박물관 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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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혜정 소장이 평생 모은 고지도들을 내보이며 각 지도의 사료적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동연 기자

우표.인형.도자기.그림.화폐.수석.술…. 세상에는 뭔가를 꾸준히 사모으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김혜정(58) 경희대 혜정문화연구소장은 그 중에서도 '고지도(古地圖) 수집'이라는 흔치 않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20대 초반 우연히 고지도의 매력에 빠진 이후 지금까지 35년 넘게 지도를 사모으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모은 게 모두 900여점.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 서양에서 만들어진 지도가 600여점이고, 나머지는 동양에서 제작된 것이다. 제작 연도도 1400년대 후반부터 지난해까지 다양하다.

현재 그는 지도박물관(정식 명칭은'혜정 고지도박물관')을 내년 초 개관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분주하다. 지난 15일 박물관이 자리하게 될 경희대 수원 캠퍼스로 찾아갔을 때도 그는 일일이 지도에 일련번호를 매기고 관련 문헌이나 사료를 챙기는 일로 바빴다.

그는 "지도 소장품이 많기로 소문난 영국의 대영박물관도 300점 정도를 갖고 있을 뿐"이라면서 "900여점이 넘는 지도를 가진 박물관이 세워진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재일동포 3세인 김 소장은 도쿄(東京)의 교리츠(共立)여자대학에 다니던 시절 우연히 고서점 앞을 지나다 한 장의 고지도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낡은 지도의 예술적 아름다움에 끌렸어요. 정확한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부모님과 할아버지.할머니 등 집안 식구를 졸라 돈을 마련해 그 지도를 샀어요."

이후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지도를 사 모았다. 대학 졸업 후 마케팅 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유럽으로 여행할 기회가 많았고, 그 때마다 고서점이나 골동품상.미술상 등을 찾아다니며 지도를 사들였다.

그는 "지도에 관심을 갖고 좋은 지도를 만든 '지도강국'은 역사적으로 큰 제국을 이뤘거나 다른 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반면 그렇지 못한 민족은 늘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지도박물관이 후학들에게 역사와 학술 연구의 장으로 활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일본과 외교 마찰을 빚고 있는 동해의 명칭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난 9월 '아 동해- 그 이름을 찾아서'라는 지도 전시회를 연 데 이어 '동해'라고 표기된 지도 60여점을 묶어 'Sea of Korea'란 도록을 펴냈다.

'동해'표기와 관련해 그는 "1700년대의 지도에는 '동양해''조선해''고려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었으나 1820년 이후에 제작된 지도에서는 '일본해'로 바뀌어 있었다"며 "이때부터 일본이 팽창주의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84년 한국으로 건너와 정신박약아들을 위한 시설인 '정혜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복지 활동에도 손을 대고 있는 김 소장은 2002년 경희대 석좌교수로 초빙된 게 인연이 돼 경희대에 박물관까지 세우게 됐다.

"지도를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엔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호기심이 일어 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그는 지금도 매년 한두 달 가량은 지도 수집을 위해 유럽에서 보낸다고 했다.

이정민 기자 <jmlee@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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