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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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제2장 신라명신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승려가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몇번 껌벅이다가 불이 켜졌다.

"들어가시지요. "

슌묘가 내게 손을 내밀어 말하였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수장고 안은 몇개의 진열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진열장들이 벽면에 설치되어 있었고, 그 진열장 속에는 미데라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급 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우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미데라의 개조인 지증대사의 좌상이었다. 미데라에서 이미 나는 몇개의 지증대사 좌상을 본적이 있었다. 내가 간단하게 예불을 올렸던 수미단의 불단 속에도 지증대사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이 좌상을 어골대사(御骨大師)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내 속마음을 눈치 챈 듯 슌묘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왜냐하면 이 좌상의 얼굴 중앙에는 대사의 유골과 사리가 안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좌상을 '어골대사'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이 좌상 속에 대사의 사리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

밀교에서는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리던 고승이 죽으면 죽은 모습 그대로 불상을 만든다고 한다던가. 비록 죽은 지증대사의 데드마스크 그대로를 불상으로 만든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죽은 지증대사의 유골이 안치되어 '어골대사' 라고 불린다는 지증대사의 좌상은 그런 이유 때문일까,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또한 죽은 지증대사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은 그의 모습이 사람의 키와 거의 같은 등신불(等身佛)이었기 때문이다.

지증대사 좌상 앞에서 잠시 합장하였던 슌묘가 몇 걸음을 옮기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선생님께서는 이제 신라명신의 좌상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

슌묘는 손을 들어 다음 진열장을 가리켰다. 진열장 안에는 또 하나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나는 슌묘가 가리키는 그 진열장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순간 나는 오싹하는 전율을 느꼈다.

지증대사의 유골이 안치되어 어골대사라고 불리는 좌상에서의 느낌보다 더욱 생생한 사실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진열장 안에는 살아있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삼각형의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미소를 띠고 있는 입술은 연지를 칠한 듯 붉었으며, 살아있어 당장 이제라도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토해낼 듯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두개의 눈동자였다. 비현실적으로 길게 찢어지고, 눈 꼬리가 극단적으로 밑으로 처진 두 눈동자는 입술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그러나 그 두개의 눈동자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생명력을 갖고 또릿또릿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신라명신상이 그림으로 그려진 화상이었다면 지금 보고 있는 명신상은 나무를 새겨 만든 조각상이었으므로 입체감이 있어 인물의 사실감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천2백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상 위에 채색되었던 색채가 아직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얼굴 전체에 칠해진 흰백색의 빛깔과 날카로운 눈썹과 주름살, 미소 짓는 입술의 굴곡 진 주름살과 오똑한 콧날, 온몸을 뒤덮고 있는 도포, 그 도포 위에 새겨진 선명한 무늬의 문양. 오른손은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던 듯 손바닥을 펼치고 있고, 왼손은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 손바닥을 오므리고 있다.

그 손가락의 형태로 보아 오른 손바닥 위에는 신라명신상처럼 경전을 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왼손으로는 석장을 들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신라명신좌상 역시 오른손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의미하고 있으며, 왼손에 들린 석장은 정덕의 상징인 보현보살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신라명신의 모습이 무엇보다 내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생동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살아있었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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