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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7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75. 큰스님의 똥물 처방

산중에 살면서 가장 큰 문제는 땔감과 난방이다. 지금은 기름을 사용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전부 나무를 사용했다. 나무 구하는 일 역시 원주(院主.작은 절의 주지)인 나의 책임이었다.

한 해 동안 쓸 땔감을 겨울이 끝나는 이른 봄부터 준비해 둬야 한다. 겨울이 가고 입춘이 지나 3월이 되면 '물구리' 라는 나무를 구하러 다닌다. 물구리란 큰 나무가 아닌, 갓난아이 팔뚝 굵기만한 나뭇가지를 절집에서 일컫는 말인데, 보통 소나무로 50단 정도를 쌓아두어야 봄.여름.가을까지 쓸 수 있다.

3월부터 서두르는 것은, 4월이 돼 나무에 물이 오르기 전에 땔감 장만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물이 오르고 나면 꺾어 두더라도 나무가 쉽게 썩어버리거나 잘 타지 않는다. 그래서 3월이면 모든 스님들이 나서 물구리를 구하는데, 당시 이미 백련암 주변 가까운 산에선 물구리 구하기가 힘들어져 꽤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물구리 과정에서 제일 신경쓰이는 일은 군청 산림과 단속반이다. 다른 연료가 없는데도 관청에선 불법이라며 물구리를 단속했다. 원주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 날도 열심히 물구리를 하고 있는데, 절에 남아 있던 시자(侍者.큰스님을 모시는 스님)스님이 헐레벌떡 뛰어 올라오며 고함을 질렀다.

"산림과에서 단속하러 왔으니까 얼른 모두 피하세요. "

잔뜩 나무를 묶어놓은 현장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몸부터 숨겨 모면은 해야 한다. 지게, 톱, 낫 등 도구만 대충 챙겨서 깊은 산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다.

한참 숨었다가 산림과 직원들이 산을 내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나와 물구리를 한 짐씩 지고 산을 내려오던 길이었다.

지게 지고 험한 산을 넘어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올 때는 몸을 돌려 지겟발을 허공으로 가게해야 한다고 누누이 주의를 받았는데, 또 깜빡했다.

급한 마음에 그냥 높은 곳에서 낮은 쪽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내려오다 보니 뒤로 튀어나온 지겟발이 바위에 걸렸다. 그 바람에 몸이 가파른 산길 아래로 밀렸다. 짐 실린 지게와 한꺼번에 붕 떠버리고 말았다. '퍽' 하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의식을 잃었다.

지게는 지게대로, 물구리짐은 물구리짐대로, 안경은 안경대로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나는 산골짜기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마침 깊은 산 속이라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어 다행이었다. 어디를 다쳤는지 모르겠는데,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스님들이 쫓아와 주무르고 법석을 피운 뒤에야 겨우 숨을 돌리고 일어나 앉았다.

"또 큰스님께 무슨 꾸중을 들을까?"

온몸이 삐걱대며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가운데도 성철스님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이를 악물고 겨우 방까지 걸어와서는 며칠을 꼼짝 못하고 드러누웠다. 후유증이 없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장애인이 될 뻔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성철스님이 시자 스님에게 물었다.

"요새 와 원주가 안 보이노? 어데 갔나, 아이면 또 사고쳤나?"

예전에 내가 그랬듯 당시 시자스님도 이실직고(以實直告)할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나뭇짐 지고 내려오다가 공중제비로 나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성철스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굼벵이도 꿈틀거리는 재주는 있다카더이, 니놈도 그 순간에 어찌 지게 벗을 생각은 했노□ 니가 지게를 벗었으니 살아났제, 지게하고 같이 굴렀더라면 지금 백련암 초상 치른다고 시끄러울 뿐했데이!"

일그러진 몰골의 나를 보며 안됐다는 듯이 느슨한 꾸중을 하던 성철스님이 돌아서면서 처방전을 내놓았다.

"어혈(멍)든 데는 똥물이 최고라 했으니 똥물이나 얻어 먹어라. "

옛날엔 재래식 화장실 똥통에 대나무통을 박아두고 대나무 속으로 스며든 물을 약으로 썼다. 뼈 다친 데나 타박상에는 최고의 명약으로 통했다. 바로 그 물(?)을 마시라는 얘기다.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났다.

"인제 다 나았심다. "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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