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 8번째 시집 '풀'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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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흙은 원고지가 아니다. 한 자 한 자 촘촘히 심은 내 텃밭의 열무씨와 알타리무씨들, 원고지의 언어들은 자라지 않지만 내 텃밭의 열무와 알타리무는 이레 만에 싹을 낸다.

간밤의 원고지 위에 쌓인 건방진 고뇌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를 텃밭에서 호미를 쥐어보면 안다. 땀을 흘려보면 안다. 물기 있는 흙은 정직하다. 그 얼굴 하나하나마다 햇살을 담고 사랑을 틔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내 텃밭에 와서 일일이 이름을 불러 낸다. " ( '칠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중)

김종해(金鍾海.사진)시인이 여덟번째 시집 『풀』(문학세계사.6천원)을 펴냈다. 문단 나이 불혹(不惑.40), 사람 나이 이순(耳順.60)에 펴낸 이번 시집에는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의 아름다움과 깊이가 묻어난다. 1960년대부터 김씨는 전통.자연 서정에 치열한 내면 의식을 더해 현대적 서정을 일궜던 '현대시동인' 으로 활동했으며 70, 80년대는 사회적 현실에 대해 저항시나 민중시와는 또 다른 서정의 울림으로 대처해 왔다.

시적 형식과 내용.메시지에 대해 그만큼 고민해 본 김씨의 이번 시들은 열무며 알타리무며 모든 푸성귀를 구분 없이 잘 버무려놓은 식탁과 같다. 고뇌와 땀의 흔적까지 말끔하게 다스린 시들은 원고지 위의 작위적인 작품이 아니라 흙의 정직함, 촉촉함이 배어나는 텃밭의 시로 읽히게 만든다. 그 자연스러움은 다시 우주적 순환에 대한 순응적 깊이에로 나아가게 한다.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풀이 되어 엎드렸다/풀이 되니까/하늘은 하늘대로/바람은 바람대로/햇살은 햇살대로/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 '풀' 전문) 인간 세상에서 하늘.바람.햇살이 '그대로' 자기 구실 하기가 얼마나 힘든가. 자연은 본디대로 있는데 잘 난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얼마나 그것을 왜곡하며 스스로 고통당하고 있는가. 이순에 이른 시인의 시는 이제 뜻을 버리고 낮게 엎드려 하늘과 바람과 햇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풀' 이 되고 있다.

"한로 지난 바람이 홀로 희다/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가을/서오릉 언덕 너머/희고 슬픈 것이 길 위에 가득하다/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모자를 털고 있다/안녕, 잘 있거라/길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제 그림자를 지우며/혼자 가는 가을길" ( '가을길' 전문) 시어들도 쉽고 그 말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쓸쓸하고 슬프고 이별인 이미지도 누구나 가을이면 다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안녕, 잘 있거라' 하며 헤어지는 가을은 이 시에서 그리 슬프지만은 않다. 이순의 시인이 곧 낙엽임을 받아들이는, 가식 없는 순응 때문일 것이다. "지상의 시간이 만든/벼랑과 벼랑 사이/떨어지는 잎새를 따라가 보면/아, 그 시각에만 환하게/외등이 켜져 있다" ( '길' 중) 그 낙엽은 이승의 벼랑과 벼랑 사이에 지고 있다. 삶을 벼랑에서와 같이 치열하게, 실존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이별, 죽음의 편안한 안녕, 그리고 그 이후의 환한 외등 같은 희망의 자연적 사이클을 김씨의 시들은 깊이 있으면서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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