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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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61. 딸 수경의 佛心 잡기

고등학생 수경이 할머니와 함께 진주에서 고성으로 가는 산등성이를 넘어 천제굴로 아버지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할머니가 길을 잘못 들어 도중에 날이 저무는 바람에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다. 억지로 따라온 수경은 잠자리가 불편한 데다 화까지 나 잠을 설쳤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바로 옆에 암자가 있었다.

두번째로 아버지를 만났다. 할머니는 성철스님께 준다고 음식을 잔뜩 만들어 머리에 이고 산길을 올라왔다. 그 어려움과 정성을 성철스님은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그 음식 해온 거 전부 산아래 동네 못사는 사람들 주고 와. "

수경이 음식 보따리를 들고 산을 내려가 생면부지인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잔뜩 골이 나 다시 암자로 올라왔는데, 할머니가 "스님께 인사드리라" 며 재촉한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성철스님을 바라봤다. 큰스님이 한마디 했다.

"니 참 못됐네. "

수경은 마음속으로 '사람 마음을 참 잘 아는구나' 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굴에 묻어나는 불만을 결코 떨치지는 않았다. 그런 딸을 향해 성철스님 특유의 문답이 시작됐다.

"그래, 니는 뭐를 위해 사노?"

불만은 불만이고, 아버지의 물음이니 생각을 가다듬어가며 대답했다.

"행복을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

성철스님이 다시 물었다.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이 있거든. 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 거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수경은 속으로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겠다' 는 결심을 했다. 그러자 묘하게도 그때까지 큰스님을 미워했던 생각들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마음의 변화를 느끼며 성철스님께 물었다.

"어떤 것이 영원한 행복이며, 어떤 것이 일시적인 행복입니까?"

"부처님처럼 도를 깨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고, 안그라고 이 세상에서 오욕락(五欲樂.세속적 욕망과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것은 일시적인 행복이니라. "

수경은 벌써 아버지 성철스님의 말씀에 빠져 있었다.

"도를 깨치는 공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면 되는 거라. "

수경은 그 자리에서 큰스님으로부터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받았다. 큰스님의 선문답 몇 가지가 더 이어졌다. 수경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제서야 성철스님이 웃는다.

"니가 10년 공부한 사람보다 더 낫다. "

수경이 내친 김에 "이제부터 학교에 가지 않고 화두 들고 참선만 하겠습니다" 라고 다짐했다. 성철스님의 반응이 의외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끝을 제대로 못맺으면 큰 일에는 성공을 못하는 거라. "

학업을 일단 마치라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빼앗긴 수경이다. 음악이나 체육시간에는 제일 뒷자리에 앉아 혼자 참선에 빠지곤 했다.

달라진 수경을 가장 유심히 본 사람은 할아버지(성철스님의 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몇 번 수경이를 불러 이것 저것 물어보더니 하루는 마음을 정리한 듯 나들이 계획을 발표했다.

"지가 올리는 없을 거고, 내가 가서 봐야제!"

이미 '철수좌' 로 도명(道名)이 높은 아들을 찾아 먼길을 떠나겠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길눈이 밝은 하인을 앞세우고 천제굴로 향했다. 20여 년만에 아들을 만난 아버지의 첫마디는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였다고 한다. 불교에 아들을 뺏기고 동네 유림으로부터 배척당해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농축된 한마디였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성철스님이 아니다. 그날 성철스님은 거듭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성철스님은 짧은 만남을 마감하고 돌아서는 아버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부지를 뵈옵고 옛날과 다름없이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앞으로도 오래 오래 사실 것입니다. "

성철스님의 위로와 인사를 받고 산청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조용히 낫을 찾아 들곤 경호강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동안 석가모니에게 복수하기위해 '물고기 대량살상용' 으로 쳐놓았던 그물을 손수 찢어 거두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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