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수민이 엄마' 윤석화 천사의 날개 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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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는 삶은 없고, 그래서 또한 사랑이 필요한 거야.
사랑하는 아들아, 일곱 번째 교훈이다.
외로움을 이해하는 자세로 살며, 그 외로움의 파도를 넘어
오직 사랑의 방향으로 가거라.
지금은 너의 그 웃음소리로, 아니 생명 그 자체로
이미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단다.
그러나 조금 더 자라서 너의 자각이 생기고
생각과 의미를 깨닫게 될 때는, 그리고 그것이
의외의 상처로 돌아올 때는 너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최소한의 너를 보호하려고 할지도 몰라.

- 윤석화가 아들에게 보낸 일곱 번째 편지 중에서

작은 평화
윤석화 지음, 중앙m&b, 183쪽, 1만1000원

연극배우더러 ‘연극하지 마’라고 말하는 건 단순히 무대에서 내려오라는 요구보다 훨씬 가혹한 주문이 될 것이다. 30년을 무대에 선 윤석화에게 ‘연극하지 마’라고 말하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스스로 미쳐 죽거나 그렇게 말한 자를 죽이려 들지 모른다. 그녀에게 연극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연극배우 윤석화가 늦은 나이에 입양을 하고 그 극적인 경위와 소중한 느낌을 책으로 낸다고 했을 때 어떤 이들은 이것 또한 연극의 연장선이 아닌가 우려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런 의혹을 품은 이라면 이 책을 찬찬히, 적어도 안단테나 모데라토의 속도로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물론 읽기 전에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라는 찬송을 하나 부르는 것도 좋다.

남의 시선을 끄는 건 일차요,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이차다. 통속의 시선으로만 보면 입양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저기에서 떠드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입양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대단한 일일지라도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권면하고 싶을 것이다.

스타는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다. 설렁탕을 싫어한다고 설렁탕이 잘 안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중의 스타는 싫어하는 게 곧 미워하는 경우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윤석화는 개성이 강한 배우다. 말투나 몸짓도 그 스타일에 따라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확실히 연극적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녀의 삶 자체를 장식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분명히 말하건대 그녀의 스타일을 존중은 못하더라도 능멸할 이유는 없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하는 연극은 꾸며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녀가 무대 밖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꾸며서 지어낸 게 아니다. 오랫동안 만나고 오랫동안 대화해 본 바에 따라 감히 증언하는데 그녀는 지극히 솔직하다. 아니 솔직하다 못해 어떤 때는 민망할 정도다. 그런 스타일을 못 견뎌 하는 사람이 그녀의 순정과 진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이 편지모음을 읽으며 나도 나의 어머니를 다시 발견했다. 모처럼 잠언의 향기를 맡는 재미도 일깨워 주었다. 책을 덮고 나서는 비로소 그게 재미라기보다 잔잔한 기쁨임을 깨달았다. 재미야 그 대상에 빠지기만 해도 건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기쁨은 그보다는 굴곡을 거친 후에 따라오는 선물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평화’는 재미있는 책이기보다는 기쁨을 주는 책이다.

그녀의 인터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접속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한 문장에 하나씩 나온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이건 화법이나 화술 이상의 것이다. 그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삶을 산 것 같지만 그건 우리가 조명 아래서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스타 다큐-윤석화편’을 연출하면서 그녀야말로 인생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임을 나는 알아냈다. 절망이 바닥을 치면 희망이 튀어 오른다는 걸 그녀의 삶은 증언한다.

그녀의 극적인 삶을 엿보면서 과연 인생은 연극인가, 인생은 연극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내가 내린 중간결론은 때로 인생은 연극이고 때로 인생은 연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가 아들 수민이를 만난 건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나는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다. 혹시라도 이 만남이 몇 막 몇 장의 플롯을 가진 연극이 되면 어쩔까 하는 걱정 말이다. 그녀가 쓴 편지를 따라 읽으면서 나의 부질없는 걱정에 진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과의 뜻으로 책의 말미에 나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살아생전 몇 명의 천사와 몇 명의 천재를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민망하고 쑥스러워 못 견딜 테지만 그대는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천재임에 분명하다. 대사를 외는 건 기술이고 연기를 하는 건 재주이지만 그대에겐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토요일밤의 열기’로 그대가 뮤지컬 연출상을 받았을 때 나는 모차르트를 샘내는 샬리에르의 표정으로 말했다. “한 가지만 잘 해도 석화인데…” 어쨌든 석화는 제대로 몸값, 이름값 하는 여자다. 무생명(돌)에 생명(꽃)을 피우는 사람 아닌가.

석화가 수민이를 만나는 ‘사건’에 친구인 내가‘연루’되었다는 사실에 종종 나는 감격하고 은근히 행복하다. 어찌 그런 역사가 이뤄졌을까. 고백하자면 그건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이미 그대에게 말해 버렸지만 수민이를 만나러 가기로 계획된 사람은 석화가 아니라 황신혜였다.

‘조각 미녀의 위탁모 체험’이 내가 그린 애초의 그림이었다. 신혜의 스케줄이 맞아 떨어졌다면 그대와 수민이와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식은 땀 나는 일 아닌가. 그러나 나의 프로그램은 신이 계획한 원대한 프로그램에 비하면 종이 한 장의 무게도 아니었다. 내 친구 석화는 ‘토요일밤의 열기’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친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다. 그래서 석화는 드디어 만났고, 울었고, 마침내 품었다. 아, 신은 얼마나 뛰어난 기획연출가이신가.

변해가는 그대를 보면서 나는 이제 그대에게 바치는 헌사를 수정하기로 마음먹는 중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대는 천재의 겉옷을 벗고 천사의 날개옷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그대를 변화시킨 신의 놀라우신 계획에 가슴이 벅차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이 친구에게 수민이의 결혼식 주례를 맡겨 준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례사로 보답하겠다.

주철환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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