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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해외서 나래 편 스크린의 '나비' 김호정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무척이나 더웠던 올 여름의 끝자락에 불쑥 스위스 남부 도시에서 가을바람 같은 소식 하나가 날아 왔다.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나비' 의 김호정(32)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는 낭보였다. 아직 개봉 전이라 국내에서 주목받을 기회가 없었던 '나비' 가 어느새 로카르노로 날아가 양 날개에 근사한 색을 입힌 것이다.

칸 다음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로카르노 영화제는 참신한 인물을 발굴하는 품격있는 영화 축제다. 스탠리 큐브릭.조지 루카스.첸 카이거가 거쳐갔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프루 첸(홍콩).자파르 파나히(이란) 등 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 감독들도 이 영화제 '동문' 들이다. 1989년 그랑프리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의 배용균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8천명의 유럽인이 운집한 로카르노 피자그란데 광장 야외극장 무대에 올라 표범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던 김호정. 14일 오후 비행기에서 내려 안국동 집에서 겨우 세수만 하고 나온 그를 사간동 국제화랑에서 만났다.

여독을 풀 겨를도 없었던 그는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이 야무졌고 목소리가 또랑또랑했다. 더구나 "꾸미지 않는 것이 좋다" 며 서른이 넘은 여배우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사진을 찍는 건 아무나 못할 자신감이다.

사실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됐는데 그까짓 피로쯤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그녀에게 신데렐라란 표현은 무례일 수 있다.

그 상이 거저 굴러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무로에선 무명일지 몰라도 연극판에선 연기력을 인정받은 스타급 배우다. 대표작 '바다의 여인' '나.운.규' '메디아 왈츠' 등에서 정열적인 연기로 98년엔 히서연극상을, 올해엔 백상예술상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2000년)가 데뷔작. 유산의 아픔을 달래는 차가운 이성재의 아내 역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야 영화에 나왔을까? "연극을 이해하는데 10년이 걸린거죠. 영화계와는 인연도 없었구요. 불과 몇 년 전에야 동국대 연극영화과 선배인 한석규.박신양씨의 영화들을 봤을 정도니까요. 그때서야 비로소 영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더군요. "

그 랬다. 지금까지 연극은 그의 전부였고 그 곳에 묻혀 산 것이다. 무대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샘솟더라고 했다.

"그런 질문을 받아요. 연극판에서 잘 나가면서 영화 데뷔는 '잠깐' 나오는 조연인데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구요. 사실은 '플란다스의 개' 이전에 '침향' 이란 영화에 주연을 맡아 몹시 힘들게 작업했는데 상영이 제대로 안됐어요. 그러니 오기가 생기더군요. 주.조연 가릴 이유도 없었죠. 그 무렵 시나리오가 멋들어진 '플란다스…' 가 제게로 왔죠. "

지난달 '나비' 가 국내에서 기자 시사회를 가졌을 때만 해도 평단의 반응은 그리 탐탁치 않았다. 잊고 싶은 기억만을 지워주는 '망각 바이러스' 에 물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 대해 혼란스럽다는 반응이 앞섰다.

하지만 로카르노는 좀 달랐다.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영화라고 호평하며 여우주연상과 함께 작품에는 젊은 비평가상을 안겨줬다.

"사실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어요. 작품상 후보에까지 거론됐으니까요. 그래서 감독과 함께 폐막식까지 기다리기로 했는데 정말 상을 주더군요. 하하 - ."

충무로는 이제 그에게 많은 시나리오를 건넬 게 분명하다. 그러나 출발이 늦은 만큼 시나리오 선택이 부담스러울 듯했다.

"아니예요. 전 지금이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진작부터 흔히 말하는 대중 스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연극을 고집했겠어요. 빛나진 않더라도 하고 싶은 역을 하면 되죠. 물론 연극 무대에도 계속 오를 거구요. "

현장에서나 생활에서 연기자에겐 기다림의 미덕이 중요한 만큼 조급하게 영화를 찾지 않을 것이란 게 김호정의 담담한 다짐이다.

"앞으로도 그 전처럼 차분했던 제 보폭을 유지하며 살겁니다. 진실하게 모든 것을 대하면서요. 왜냐하면 전 제가 알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야 하는 연기자니까요. "

그에겐 지금 코 앞에 닥친 일이 있다. 연극 '첼로와 케찹' (28일부터 문예회관 소극장)에 출연하는 것. 인터뷰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어깨에 가방을 달랑 멨다.

그리고 "연습을 너무 못했어요, 어머, 벌써 늦었네요" 라고 인사를 건낸 뒤 미술관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내달려가는 그에게선 다른 배우에게서 찾기 힘들었던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느껴졌다.

신용호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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