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겉다르고 속다른 고이즈미 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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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기어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전범들이 피해 당사국들에 입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외면한 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그 비정함에 깊은 실망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종전기념일을 피하고, 주변국에 대한 일말의 배려를 담화에 담아 발표한 '꼼수' 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라는 문제의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말로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따른 참해(慘害)와 고통을 이야기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반성과 애도를 입에 올리면서도 전범들이 포함된 여러 영령들 앞에서 일본의 평화와 번영을 다짐하는 그 이중성에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겉다르고 속다른 일본의 이중성 앞에서 일본과의 국가적 신뢰관계란 것이 얼마나 허황된 신기루에 불과한 것인지 또 한번 절감한다.

패전일인 15일이 아닌 13일에 그것도 개인비용임을 굳이 앞세운 그의 얄팍한 계산의 참배 방식은 일본과 아시아 주변국 모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믿을 수 없는 정치인으로 그를 각인시킬 것이다.

정치적 소리(小利)에 집착해 대의를 팽개친 고이즈미 총리가 과연 일본을 21세기 국제사회의 지도적 국가로 끌고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로 한.일관계의 악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역사교과서 문제와 남쿠릴열도 꽁치조업 문제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까지 겹쳤으니 월드컵대회의 공동 개최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당장 걱정이다.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에서 다짐한 우호.협력의 장래도 불투명해졌다.

양국관계 악화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미래보다 과거, 신뢰보다 불신을 택한 일본측에 있음을 고이즈미 총리는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 정부와 국민은 일본의 실체를 정확히 보고 강력히 대응해야겠지만 냉철함을 잃어서는 안된다. 특히 몇몇 청년들이 벌인 단지(斷指)사건은 한.일문제의 본질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비상식적 돌출행동인 만큼 더 이상 되풀이돼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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