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중국동포 3만명이 떠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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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국과 중국 노래가 번갈아 흘러나오는 노래방. '東北城' '中國食品' 등 한자로 쓰인 거리 간판. 불법체류하는 중국 동포가 경찰의 눈을 피해 선술집 구석에서 커우베이주(컵술)로 설움을 달래는 곳.

서울 구로공단 주변의 가리봉.가산.대림동 일대에는 중국 동포 노동자들이 최근 몇년새 몰려들어 '조선족 타운' 이라고 불리는 이방인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본사 취재팀은 이곳에서 한국과 중국, 어느 곳에도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중국 동포들의 삶과 애환을 4회 시리즈로 집중 조명했다.

지난 12일 밤 서울 구로구 가리봉1동. 길이 5백m의 골목에는 중국식(式)의 잡화상.주점.음식점.노래방 40여곳이 영업하고 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얼핏 내국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중국 동포들. 이들의 입에서는 중국 말이나 조선족 사투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이곳이 구로구 '옌볜동' 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99년이었다. 우리 사회가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코리안 드림' 을 좇아 중국 동포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들어 그 수가 현재 3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주변 영세공장의 허드렛일이나 공사장 막노동과 월 5만~10만원이면 얻을 수 있는 값싼 '쪽방' 이 유인제가 됐다.

이곳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게 다 있다. 심지어 조선족 조직폭력배까지 들어와 있다. 동남아 등 다른 국가의 불법 체류자들과 달리 중국 동포들은 미국 LA의 코리안 타운처럼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 머무르고 있는 중국동포는 10만여명. 불법 체류자가 대부분인 이들은 저임금.임시 직종에서 일하면서 자유로운 출입국은커녕 강제 추방의 공포에 시달린다. 하지만 국내에서 일년 동안 번 것이 중국의 10년치 봉급과 비슷해 각종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다.

본사 취재팀이 '조선족 타운' 에 사는 중국 동포 1백11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 전체의 73%가 불법 체류자였다. 60% 이상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서 월 1백만원 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또 한국인에게 폭행.임금체불.사기 등의 멸시나 피해를 당한 적이 있는 경우가 66%에 달했다.

이들은 민족 정체성에도 혼란을 겪고 있다. 면접 조사자 중 49%가 자신을 '중국인' 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한국인' (32%), '어느 쪽도 아니다' (19%)는 응답도 절반에 달했다. 특히 국내 체류 기간이 긴 동포일수록 자신을 '한국인이 아니다' 고 답했다. 고된 국내 생활이 반한(反韓)감정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 내 조선족 연구의 권위자로 내한 중인 고베(神戶)대학 사사키 마모루(문화인류학)교수는 "북한 지역에서 중국으로 대거 이주해 형성된 조선족이 다시 남한으로 '제2의 엑소더스(대이동)' 를 하고 있다" 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이 조선족을 단순한 외국인 노동자 정도로 간주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그들의 법적 지위와 경제적인 활용 방안 등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마련할 시점" 이라고 강조했다.

이규연.김기찬.조강수.강병철 기자

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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