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5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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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53. 스무살때 불교에 관심

성철스님은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초등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글에 관한 기초가 잘 다져진 셈이었다. 덧붙여 책읽기를 좋아해 동서고금의 이름 난 책들을 혼자서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젊어서는 다독(多讀)주의였어. 관심이 많아 이런 저런 책들을 보기는 많이 봤는데, 처음 볼 때는 뭔가 있나 하다가 곧 싫증을 내곤 했지. 그래서 어디 크게 마음을 못붙였는데, 그러다가 불교의 증도가(證道歌.선불교의 깨달음을 노래한 운문을 모아놓은 책)를 얻어보고는 캄캄한 밤중에 횃불을 만난 것 같고 밤중에 해가 뜨는 것 같았지. 내 갈 길이 환희 비치는 것 같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출가하기 전에 증도가를 감명 깊게 많이 외웠지. "

성철스님의 지적 편력은 큰스님 본인이 출가하기 전인 1932년 12월에 직접 써놓은 서적기(書籍記)에서 잘 나타난다.

큰스님이 붓으로 쓴 책 목록 가운데 눈에 띄는 책들을 보면 『철학사전』.『논리학통론』.『동서사조강화』.『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민약론』.『자기암시법』.『신구약성서』.『사적유물론』.『철학체계』.『역사철학』.『유물론』.『자본론』 등이 포함돼 있다. 자신이 읽었던 약 70여권의 책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다.

지리산 산자락에서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청소년이 읽었으리라고 짐작하기 어려운 책들이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동양 사서삼경 등 고전은 물론이고 서양 철학서들도 구할 수 있으면 모두 구해 읽었다.

도쿄 유학생들이 방학이 돼 고향에 돌아오면 책 구경하러 일부러 찾아갔다고 한다. 성철스님이 보지 못했던 책이 있으면 쌀가마를 지고 가 책을 샀다고 한다. 큰스님의 그런 편력에 대해 간간이 들어왔는데, 큰스님 입적 이후 유품을 정리하다 서적기를 발견하고는 지난 말씀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했다.

또 지금 도선사 선원장이신 도우스님이나 입적하신 일타스님이 들려준 말에 따르면, 한 때 성철스님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여러 유학생.학자들과 만나고 도서관을 뒤지며 책을 읽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렇게 진리를 찾고자 하는 성철스님의 끝없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세속 여러 학문에서는 길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유학자 집안이라 누가 불교에 관심이나 뒀나. 그런데 출가 전 어려서부터 몸이 안좋아 약탕관을 메고 대원사란 절에 자주 요양하러 갔었는데, 그래 다닐 때도 아무 생각이 없다가 스무살이나 되니까 불교에 관심이 가더라구. "

당시만 해도 대처승(帶妻僧.결혼한 승려)이 대부분이라 절 마당 빨랫줄에는 아기 귀저기나 여자 속옷이 걸려 있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성철스님은 "이게 무슨 절 살림이고" 라는 불쾌감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성철스님이 불교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앞의 증도가와 중국 송나라 때의 대혜스님이 지은 서장(書狀)이라고 한다.

서장이란 대혜스님이 사대부 등에게 참선하는 이유와 방법 등을 편지 형식으로 설명한 글을 모은 책이다. 현재도 승가대학 또는 강원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성철스님은 "증도가와 서장을 보고 지금까지 세속의 학문을 통해 접했던 진리와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셨다" 고 말하곤 했다. 성철스님은 이후 '불교' 라는 잡지를 보면서 화두를 선택했다. 바로 '무자화두(無字話頭)' , 선종 발달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두다.

'무(無)' 라는 화두의 유래는 이렇다. 중국 당나라 시절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778~897)스님에게 물었다.

"개(犬)에게는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중국 선불교 전통에 큰 획을 그은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없다(無). "

정확히 말하자면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이란 화두다. 이 말이 왜 화두가 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위로는 과거의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저 미물에 이르기까지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 고 한다.

그런데 조주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 모순에 대한 의문.의심이 참선의 출발이다. 성철스님은 이에 대해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이를 의심하고 의심해 가는 것이 무자 화두의 참구고, 참선정진" 이라고 설명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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