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누리] 서태지의 문화적 위상과 '빗나간 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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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지난주 가수 서태지씨와 이재수씨의 법정 다툼에 관한 글이 나간 뒤 서씨의 많은 팬들이 e-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주장의 대부분은 '이씨측이 저작권을 침해한 게 문제이며, 힘없는 뮤지션인 서씨는 피해자로서 거대 기획사와 싸우고 있다' 는 것입니다.

한편 서씨는 팬을 위한 전화사서함에 '이씨측이 패러디 허락을 요청했으나 거절한 바 있으며, 음반 발매와 관련해 저작권협회에 사후 승인을 하지 말라고 요청했는데도 협회가 승인한 것은 부당하다' 는 요지의 주장을 남겼습니다.

이에 대해 이씨측은 합법절차를 밟았다고 반박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법적 다툼은 법원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저작권법과 관련해 누가 옳은 지는 법원이 결정할 겁니다. 은퇴와 컴백을 되풀이할 때마다 나라가 떠들썩하고, CF 한편으로 10억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이는 서씨가 힘없는 뮤지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패러디에 대한 서씨의 기본 태도입니다. 서씨는 이씨측이 자신의 노래 가사를 '조잡하고 유치하게' 개사하고, 패러디 뮤직비디오를 통해 '인격을 모독하고 수치심을 느끼도록 했다' 고 합니다. 판매금지 등 가처분 신청서에서 그대로 인용한 표현입니다.

혹시 서씨는 모든 패러디가 원작 이상의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또는 보통 가수는 몰라도 뛰어난 뮤지션인 자신의 작품만은 자기가 요구하는 수준 이하로 패러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바로 이 점에서 문화적 권위주의의 혐의를 지적했던 것이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서씨의 문화적 위상에 비추어 이는 충분한 논의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태지 매니어' 를 자칭하는 일부 팬들이 보인 반응은 실망스럽습니다. '너 죽고 싶냐?/멍청하게시리/별 그지같은 기사/○○엔터테인먼트의 앞잡이/터진 입이라고…' .

욕설과 비하로 뒤범벅된 e-메일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차마 옮기기 민망한 언사도 많습니다. 하나만 보시겠습니까.

'저주하마, 오늘부터 너희집 가족들 다 재수없는 일만 걸리라고. 너 혹시 결혼했냐□ 너희집에 불운만 따르길, 나가 뒤져라 이 붕신아. '

이 정도면 철없는 일부 댄스 그룹 10대 팬들의 행태를 넘어 거의 폭력 수준입니다. 관련 인터넷 게시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권위에 반발하는 전복의 상징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온 서씨가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간 것도 씁쓸하지만, 이를 계기로 한국의 팬문화와 인터넷 문화의 현주소를 다시 확인하는 것 역시 우울한 일입니다.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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