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 자른 외교관 유길준, 고교 입학 석 달 만에 영어회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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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호 31면

1881년 5월 일본 유학을 간 유길준은 일본의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미국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장 에드워드 모스를 만났다. 일생 최대의 전환점이 되는 운명적 만남이었다. 그는 후쿠자와 집에 머무르며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했다. 모스는 당시 도쿄대 동물학과 교수로 초청받아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1883년 일본에서 돌아온 뒤 보빙사 통역으로 선발돼 상투에 갓을 쓰고 미국에 갔던 유길준은 머리를 서양식 하이칼라로 자르고 양복으로 바꿔 입었다. 조선식 복장은 미국에서 곡마단 복장으로 놀림받을 정도로 낯설었기 때문이다. 유길준은 갑오개혁 때 내부대신으로 단발령을 주도하며 손수 가위를 들고 세자의 머리를 깎아 큰 파문을 일으켰다.

보빙사 통역을 맡은 퍼시벌 로웰(『조용한 아침의 나라』저자)은 하버드대를 졸업했는데 그의 형은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보스턴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는 유길준을 대학 친구인 모스에게 데리고 갔다. 유길준은 모스의 개인 지도 아래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28세에 거버너 덤머 아카데미(고교) 3학년에 편입했다.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학생들과 함께 영어·수학·지리·라틴어 등을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학습 능력은 뛰어났다. 석 달 만에 독학으로 영어회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유길준의 후견인이라고 할 모스 교수와의 편지에서는 학교생활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유길준은 1884년 11월 3일 편지에서 “화산·지진·간헐천 등에 관한 지구과학 시험에서 94점, 수학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다른 편지에서는 “어제 시험을 보았는데 87점을 맞았다. 다른 학생보다 16점 더 높지만 만점인 100점보다 13점 낮은 점수”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에 갓 온 유길준이 불철주야 전력을 다해 공부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유길준은 갑오개혁을 주도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894년 군국기무처는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전문학교, 외국어학교 설치를 의결했고 1895년 고종은 교육조칙을 발표했다. 미국에서 2년간 고교를 다닌 유길준은 하버드대에 진학해 국제법을 전공하려고 했다. 당연히 조선의 교육이 서구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는 근대화를 하려면 교육개혁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교육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지금도 그가 세운 은로초교(서울 흑석동)에서 어린 새싹들이 자라나고 있다.

미국 유학, 가택연금, 개화사상서 집필, 갑오개혁 주창, 일본 망명, 일본 사치조섬 유배 등을 겪은 유길준은 한일병합 후 일본이 주는 남작 칭호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유길준은 슬하에 만겸과 억겸 두 아들을 두었다. 만겸은 충북지사로 일했고 억겸은 미 군정청 시절 교육부장으로 일했다. 연세대학교 유억겸기념관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유길준의 삼촌(유진태)은 멕시코에서 이민 1세대를 이끈 리더였는데 증손녀 노라 유가 한국인 최초로 멕시코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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