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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약탈 문화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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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이 나라에 군림하던 구한말. 황제 자리에서 밀려난 고종이 창덕궁 박물관을 찾았다. 고려청자를 보고 "이게 어디서 만들어진 거요"라고 물었다. 이토 통감이 "이 나라 고려시대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고종은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 없는 거요"라고 했다. 이토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황제조차 고려청자를 모른 것은 당연했다. 청자는 500년 전 고려의 귀족문화와 함께 무덤 속으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유교적 관념에서 남의 무덤을 파는 행위, 즉 굴총(掘塚)은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다. 그래서 청자는 완벽하게 소장돼 있었다. 지하소장고가 파헤쳐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긴 1904년 이후다. 호리꾼(도굴전문가)이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몽고 침입 당시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로 몰려들었다.

물건을 사들이는 큰손은 당시 한반도에 진출한 일제 고관대작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손은 이토 통감이었다. 권력의 비호를 받는 골드 러시를 찾아 수백명의 호리꾼이 인천에 상륙했다. 이토의 재임 2년간 고려 귀족의 무덤 대부분이 파헤쳐졌다. 무덤에서 훔친 청자 수천점을 일본 유력자들에게 선물하고자 빼돌려온 이토 통감이 고종 앞에서 함구한 것은 당연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다음해인 1966년 도자기.고문서 등 1000여점이 반환됐다. 약탈당한 문화재의 극히 일부다. 개인 소장품은 반환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도 좋은 물건은 대부분 일본에 남아 있다. 특히 도자기의 경우 오사카(大阪)시립박물관을 봐야 그 진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문화재의 약탈과 반출은 제국주의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서양에서는 대영박물관의 엘긴 마블(Elgin Marbles)이 대표적이다. 2500년 전 그리스 문명의 정수인 파르테논 신전 주요 조각상을 영국인 엘긴 경(卿)이 1810년 통째로 떼 옮겼다. 그리스가 1941년부터 반환을 요청해 왔으나 영국인들은 별생각이 없다.

우리나라 무속인이 일본 가쿠린지(鶴林寺)에 보관돼 있던 고려 불화(아미타삼존상)를 훔쳐왔다. 가쿠린지 주지와 절친한 재일동포가 담당 검사를 만나 반환을 호소하고자 서울을 찾았다. 과연 뭐가 진정한 반환일까.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