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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5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51) 엉터리 깨우침 무기병

백련암에서 시자 생활을 하면서 더러 마주친 '색다른 광경' 이 있다. 큰절 선방에서 참선수행하다 "깨쳤다" 고 주장하는 스님들 얘기다. 이런 스님이 나타나면 열중(悅衆.선원의 실무 책임자)스님이 산중에서 가장 큰 어른인 성철스님에게 데려온다.

이런 경우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스님에겐 성철스님과의 독대(獨對)기회가 주어진다. 깨달음의 세계는 두 사람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함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는 경우도 있고, 조용히 긴 시간이 흐를 때도 있다. 독대가 끝나고 깨달았다는 스님이 돌아가면 성철스님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먼저, 기분이 좋은 경우 큰스님이 들려주는 설명이다.

"내 말 잘 듣고 갔다. 내가 뭐라 했나하면, '니가 지금 깨쳤다, 알았다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니가 나를 믿는다면 내 가르친 대로 고치고 더 열심히 정진해라' 고 타일렀지. 그러니까 그 놈이 '지금껏 제 공부가 다 된 줄로 잘못 알았는데, 앞으로 큰스님 가르침에 따라 공부 더 잘 해보겠다' 카더라. "

성철스님이 노기등등한 경우도 있는데, 가르침이 통하지 않은 날이다.

"그 놈이, 지가 공부 다 했다 하길래, '뭐가 다 했노? 니, 지금 내하고 이야기하면서도 화두가 잘 되나?' 하고 물어봤다.

그런데 그 놈이 '스님, 화두 드는 거 그것이 무슨 문젭니까? 저는요 좌복 위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번뇌망상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고 저 청천하늘처럼 맑아서 마음이 편하기 이를 데 없는데 내가 왜 화두를 듭니까? 화두를 들었다 하면 오히려 망상이 생기는데.

화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라는 거라. 그래서 내가 '그거는 무기(無記)에 빠진 거지, 진짜 참선공부가 아니데이. 그러니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좋은 거 다 내버리고, 그 자리에 화두가 들어서도록 다시 공부해라' 고 타일렀지.

그런데 이 자슥이 말을 못알아 듣고 '아닙니다. 스님이 틀렸습니다. 내 마음 맑은 것 내버리고 무슨 공부 다시 하랍니까? 나는 이것으로 깨쳤으니 공부 다 마쳤심더' 라고 버티는데, 아무리 말해도 안듣데. 그저 탕탕 쳐서 다시는 내 앞에 못 오게 했제!"

두 경우 모두가 사실은 무기에서 비롯된 무기병(無記病)이다.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이 여러 장애물을 넘어 마지막으로 부닥치는 장애다.

처음엔 산란심으로 화두도 못 챙기고, 다음엔 상기병이 생겨 화두를 들지 못하고, 그 다음엔 잠이 쏟아지는 수마(睡魔)로 화두를 챙기지 못한다. 그렇게 고생 고생 정진해 이런 어려움을 다 이기면 나타나는 것이 무기병이다. 큰스님도 이 마지막 단계의 장애를 경계했다.

"무기병에 떨어지면 헤어나기 힘들데이. 너그도 조심해야 된다. 화두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이 전과 비교하여 그렇게 편할 수가 없고, 그래서 자기는 깨쳤다는 착각에 빠지거든. 착각하고 나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지. "

성철스님이 나이가 들면서 더이상 독대관행은 불가능해졌다. 큰스님이 무기병을 지적하면 "큰스님이 틀렸다" 면서 육탄으로 달려드는 스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열중 소임을 맡은 중진 스님들이 입회하게 됐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해인사 산내 비구니(여승) 암자에서 수행하던 한 스님이다. 큰절의 선방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열중스님이 데리고 오는데, 비구니 스님은 별도 암자에서 수행하던 분이라 혼자 올라와 큰스님 뵙기를 청했다. 내가 이유를 묻자 "내가 깨쳤으니 큰스님 뵙고 인가(印可 : 깨쳤음을 증명하는 것)를 받으려고 한다" 는 것이다. 내가 먼저 물었다.

"그러면 성철스님께서 '스님의 경계가 어떻다 하느냐' 고 물으시면 뭐라 대답할까요?"

"내가 가만히 앉아 선정에 들면 시방세계(우주전체)가 내 몸에서 나는 향내로 가득하다고 일러주이소. "

성철스님께 가 비구니 스님이 찾아온 사연을 그대로 보고했다. 큰스님이 오히려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다가 호통을 쳤다.

"지 몸에서 나는 향기가 우주 전체에 가득하다 하는데, 지 옆에 있는 사람은 와 냄새 못 맡는고□ 이 자슥이, 니 놈도 똑같다. "

혼비백산 물러나와 비구니스님에게 말했다.

"그럼 스님 옆에 있는 스님도 그 향기를 맡습니까?"

"아니, 내가 깨쳤는데 내만 맡아야지요. "

돌아가라고 설득하는데 꽤 애를 먹었던 기억이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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