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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광장] 마음속의 베를린 장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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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오는 13일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꼭 40년이 된다.

1961년 8월 13일 아침, 잠을 깬 베를린 시민은 깜짝 놀랐다. 동.서 베를린의 경계 43㎞ 구간과 서베를린을 에워싼 1백12㎞ 구간에 철조망이 쳐진 것이다. 이날 새벽 1시부터 동독 군인들이 전격적으로 철조망을 설치, 서베를린은 말 그대로 '육지의 섬' 이 됐다.

며칠 뒤 철조망이 쳐진 자리에는 콘크리트 장벽이 올라갔다. 이렇게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28년 뒤인 89년 11월 9일 붕괴될 때까지 동서진영을 가르는 분단과 대립의 상징물이었다.

동독이 장벽을 건설한 이유는 서독으로의 주민탈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49년부터 61년까지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이주한 사람은 2백70만명. 대부분이 교수와 의사.기술자.학생 등 인텔리 계층이어서 동독으로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벽도 자유를 향한 동독인들의 의지를 막지는 못했다. 베를린 장벽과 동.서독 국경을 직접 넘어 서독으로 탈출한 주민이 3만8천명에 달한다. 베를린 장벽을 넘다 사망한 사람은 2백67명에 달한다.

가장 유명한 희생자는 장벽 건설 1년 뒤 찰리 검문소 인근 장벽을 넘다 사살된 당시 18세의 페터 페히터군.

동독 병사의 총을 맞고 쓰러진 그는 구조되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 이를 지켜보던 많은 서베를린 시민이 눈물을 흘렸다.

이들에게 발포를 명령한 책임자와 발포자는 통일 이후 모두 중형을 선고받았다.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주민을 사살한 행동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는 게 판결 이유였다.

통일 자체가 아득한 과거가 된 지금, 베를린 장벽은 이제 역사의 유물로 사라졌다. 지금 남아 있는 장벽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옛 찰리 검문소 인근지역과 동부역(오스트반호프)앞 약 1㎞ 구간이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란 이름으로 보존돼 관광객들이 찾고 있을 정도다.

찰리 검문소 옆 장벽박물관에는 건설부터 붕괴까지의 생생한 기록과 탈출자들이 이용한 장비 등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동.서독 주민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마음의 장벽은 아직 허물어지지 않고 있다. 장벽 건설 40주년을 기념해 이번주부터 베를린에서 열리기 시작한 학술제와 영화상영.전시회 등 각종 행사의 초점은 바로 이 마음속 장벽 허물기에 모아져 있다.

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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