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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칼럼] 8·15에 꼭 할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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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여당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지난 3년간 심혈을 기울여온 구조조정에 대해 국제통화기금(IMF).경제협력개발기구(OECD)등이 낮은 점수를 주고 있고, 권위있는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국의 경제회복은 '가짜 새벽' 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고 혹평했다. 수출은 급격히 감소하고 성장 전망은 날로 비관론이 깊어지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론 세무조사에 대해서도 국민 다수가 '언론탄압' 이라거나 '정치적 동기' 를 의심하고 있다. 국가의 조세권.검찰권에 더해 많은 친여매체와 시민단체들이 신문3사를 포위공격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부에 듣기 싫은 소리가 높아가는 추세다. 최근 원로와 각계 인사 32명이 낸 성명이 결정적인 것 같다.

DJ정부가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남북관계도 언제 풀릴지 기약이 없다. 김정일(金正日)이 러시아에서 돌아오면 풀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 밀린 금강산관광 대금을 주면서 합의한 육로관광을 위한 7월 중 당국회담마저 무산됐다.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요구는 정부 입장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국내정치는 더욱 암담하다. 재집권을 자신할 만한 우뚝한 후보는 여전히 없는 상태고, 주요 국정을 야당이나 국민에게 납득시키는 능력은 거의 바닥 수준이다.

게다가 "×같은 놈" 따위의 저질욕설과 선배에게 씨(氏)자도 붙이지 않고 "아무개도 맛이 갔어" 라는 무례한 발언이 나오니 "예절이나 상식도 없느냐" 는 세간의 빈정거림도 귀따갑다. 1백세 가까운 야당총재 부친의 전력을 문제삼아 친일파 공세를 취하다가 DJ가 일제 때 '도요타' 였다는 역공을 받았다.

이런 공방에 일본인들이 얼마나 웃었겠는가. 이러다가 선조들의 임란(壬亂).호란(胡亂) 때의 행적까지 문제될지 모르겠다.

왜 이처럼 분야마다 일이 꼬일까. 무슨 처방이라야 이 난국을 풀어나갈까.

필자가 보기에 이 모든 난국을 극복할 가장 핵심적 화두(話頭)는 정부의 신뢰문제가 아닌가 한다. 정부의 말과 행동을 국민.야당과 북한.우방까지 믿을 수 있게 하느냐, 못하느냐에 남은 임기 1년반의 나라 상황이 달려 있다고 본다. 예컨대 남북관계가 왜 풀리지 않는가.

최근 전문가들의 지적을 보면 북한은 DJ가 베를린 선언에서 언급한 북한 인프라 건설, 전력지원 등이 지켜지지 않은 데 섭섭해 하고 있다고 한다. 남한에선 퍼준다고 야단인데 북한은 안준다고 섭섭해한다니 정부가 남북 양쪽에서 다 신용을 잃은 탓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만 해도 말과 행동이 달라 신용을 잃었다. 부실기업은 퇴출시킨다면서 일부 부실기업엔 끝없는 구제금융으로 살려주고 있으니 이런 이중성으로 어떻게 신뢰를 얻겠는가. 경기에 대해서도 상반기엔 하반기 회복을 말하고 3분기엔 4분기 회복을 말하는 식이니 무슨 신뢰가 생기겠는가.

정치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약속불이행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말의 국정쇄신 약속이 지켜지지 않더니 올해 6월 13일 약속도 그냥 넘어갔다. 가뭄도, 장마도 가고 이제 다시 8.15를 쳐다보게 됐으니….

언론 세무조사도 그렇지 않은가. 통상적 세무조사라더니 가장 비통상적인 특별 집중조사가 이뤄지고 특정 신문에 '수구' '친일' 따위의 정치공세를 퍼붓는 것을 보면 누가 그 순수성을 믿겠는가.

이처럼 정부.여당은 지금 가위 '4면(面) 불신' 에 휩싸인 형국이다. 이런 신(信)의 부족.신뢰위기가 지지율 하락.국정혼선.분열.갈등 등 난국의 밑바탕에 있음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정부의 신용상태는 어느 수준인가, 어떻게 해야 신뢰를 높일 수 있을까 하는 화두에 치열하게 매달리지 않는다면 난국수습책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가령 민주화투쟁에 몸바치고 노벨평화상까지 탄 노(老)대통령이 무겁게 한마디 하면 누구나 그 말을 믿어야 정상이다. 정부.여당은 신(信)의 상태를 그런 수준으로 회복해야 한다.

8.15에 기대되는 여권의 시국수습책의 기조에서 이런 신뢰회복의 의지가 담기기를 바란다. 신뢰와 인기는 다르다. 대선을 앞두고 인기몰이의 충동을 받겠지만 선심정책이 반짝 인기는 몰라도 신뢰를 높인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뢰는 오히려 침통한 어조로 솔직하게 과오를 시인할 때, 또는 진지하게 국민 인내를 요구할 때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정직과 약속지키기보다 신뢰회복에 더 좋은 약도 없을 것이다.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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