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창씨개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어머니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50여년 만에 국민학교 반창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에이코가 우리말로 뭐냐?" 고 물었다. "아마 영자(英子)일 겁니다. " 에이코는 절친했던 친구의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일제 때 사귄 초등학교 친구의 상당수를 일본식 이름으로만 기억했다. 일본어를 다 잊었기에 당신의 이름이던 사다코가 정자(貞子)라는 것 말고는 아키코.하루코 등 친구들의 우리말 이름이 명자(明子).춘자(春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제 말기의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화로 이름을 잃어버린 실명(失名)세대의 비극이다.

일제 때인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는 다음해 2월부터 6개월 시한으로 조선인의 창씨개명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시행 첫 3개월 동안 신청자는 전체 인구의 7.6%에 불과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무지막지한 강압책을 동원해 마감인 8월까지 전체의 80%를 창씨개명케 했다. 대가족의 호주가 창씨를 하면 남은 구성원 모두를 함께 따르도록 했으니 나도 모르게 성이 바뀐 사람도 수두룩했을 것이다.

총독부는 창씨를 하지 않은 집안의 자녀들을 각급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 교사들에게 어린이들을 이유없이 구타케 하고 집에 가서 창씨개명을 안해서 맞았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거부자는 징용 대상자로 우선 지명한 것도 모자라 식량 등 생필품 배급대상에서도 제외했다. 경찰의 감시대상에 포함한 것은 물론 우편물 배달도 금지했을 정도다.

이런 상황이라면 전시 생필품 배급을 받지 않아도 생계가 가능한 일부를 제외하곤 압박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말 대한제국 무관학교 학생으로 일본육사에 국비유학을 갔다가 강제적인 한일합방 후 일본군에 편입돼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총독부도 현역 육군장성에겐 함부로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창씨개명은 친일의 증거가 아니고 피압박의 증거임이 분명하다.

최근 야당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일제 때 은사와 통화하면서 창씨한 성을 대며 "도요타(豊田)입니다" 라고 한 것을 비난했다.

여당은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의 부친이 일제 때 검찰 서기를 한 것을 두고 "친일행위를 했을 것" 이라고 지레짐작만으로 공격했다.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피해자들끼리 서로 다투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채인택 국제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