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실크로드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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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실크로드 이야기』는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는 대중용 교양물로 눈여겨 볼 만하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상상력이 교차하며 고대 중앙아시아의 동서를 잇는 육상 교통로였던 '비단길(실크로드)' 로 독자를 흥미진진하게 안내한다.

책의 구성은 8세기 중반에서 10세기 말까지 실크로드에서 명멸한 인물 10명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상인.병사.목부(牧夫).공주.비구.비구니.기생.과부.관리.화가 등이 주인공인데, 이들은 모두 탁월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보통사람들이다.

이 책이 다루는 약 2백50년의 기간은 실크로드가 가장 번영을 누렸던 때다. 중국사로 보면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당나라 현종 때부터 안록산의 난을 거쳐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성립할 때까지의 시기다.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을 10세기 말로 잡은 것은 그때를 전후해서 동서 교역의 주요 교통로가 '땅길' 인 실크로드에서 '바닷길' 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열 명의 주인공이 한 편씩 뱉어낸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잊혀진 역사를 재구성해 낸다. 각기 다른 인간과 삶을 이야기하지만 앞 사람의 이야기가 다음 사람의 이야기에 실마리를 제공하며 얽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작(連作)형 옴니버스' 구성이라 할 만한데, 그걸 뒷받침하는 것이 둔황학(敦煌學)을 전공한 영국의 역사학자인 저자 수잔 휫필드의 상상력이다.

저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유럽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대규모로 발굴된 중국 간쑤(甘肅)성 둔황 석굴사원에 있던 4만여 점의 문서와 사료들을 기본 자료로 인용한다.

그러나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주인공 중 어떤 이는 자료에 상세히 기록된 인물도 있지만, 어떤 이는 지나가는 말처럼 간단히 언급돼 그 실존 자체가 의심스러운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을 자료 속에서 불러내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 넣어 역사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히게 하는 것이다.

일급 번역자 김석희씨의 지적처럼 실크로드는 쿤룬 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 등 험준한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음에도 왠지 아련하고 몽환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실크로드는 상업과 문화라는 관점에서 사실상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고, 불교의 전래를 매개로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이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에서 보이는 실크로드는 냉엄한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생활의 터전이었고, 북쪽 초원의 유목민족과 남쪽 오아시스 중심의 농경민족이 끊임없이 각축을 벌인 무대였다.

당시 실크로드 동쪽 절반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주변의 강국들, 즉 서쪽의 이슬람, 북쪽의 투르크와 위구르, 남쪽의 티베트, 그리고 동쪽의 중국이 쟁탈을 벌인다. 이 책은 바로 그 쟁탈전의 정치적 배경과 조세.법률.토지소유제도, 그리고 불교.마니교와 같은 다양한 종교의 분포 등을 일상적 삶의 모습속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초반부는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오가며 교역에 종사한 사마르칸트 출신의 상인, 당나라와 대결하는 티베트군 병사, 그리고 중국에 팔 조랑말 떼를 이끌고 고비 사막을 건너는 위구르의 목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들은 험난한 지형과 악천후를 뚫고 교역을 하고 또 전투를 벌이는 상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세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군 고선지(高仙芝)에 대한 서술이다.

당시 중국과 티베트는 대등한 전력을 유지하며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로 들어가는 길과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놓고 수십년 동안 싸우고 있었다. 저자는 고선지 장군이 '고구려 출신' 임을 분명히 밝히며 그의 활약상을 전투상황도까지 동원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고선지 장군의 허를 찌르는 기동력과 전략이 그간의 열세를 딛고 중국이 그 지역의 지배권을 탈환하게 하였으며, 그때부터 티베트 장군들도 적장인 고선지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성학자인 저자는 또 역사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삶도 복원하고 있다. 정략결혼의 제물이 되어 이역만리 투르크 궁정으로 시집간 중국의 공주, 군대를 따라 전전하다 죽을 고비를 맞는 쿠차 출신의 기생, 어린 나이에 법문에 든 뒤 승방(僧房.비구니절)주지로 생을 마친 둔황의 비구니, 그리고 불심 깊은 과부 이야기 등 4편을 통해 전쟁의 역사에서 짓밟힌 여성의 비극을 보여준다.

이 중에 우리의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내용도 있다. 예컨대 과부 이야기를 보면 시집살이에 시달리다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 이혼을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이 나온다.

이같은 열 명의 인물열전을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실크로드 주변에서 꽃피운 다양한 문화들이다.

특히 중국 주변 민족들에게 덧씌워진 '중국 변방의 역사' 라는 굴레를 벗겨내려 한다. 흔히 둔황석굴의 예술을 중국의 작품으로 간주하지만 저자가 "둔황 미술은 둔황 사람들의 업적" 임을 강조하는 데서도 그같은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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