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섬유 공장에서 홈스펀을 짜는 여성들. 서울의 광희동·창신동·숭인동 일대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서울 섬유산업의 중심지였지만 이런 산업과 생활의 산 역사가 현대 도시 재개발 과정에 고려된 적은 없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임진왜란 중 우리나라 최초의 상비군으로 훈련도감이 창설되자 군영 주변은 직업 군인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 되었다. 훈련도감병은 조선의 최정예병이었기 때문에 대우도 남달랐다. 도감병에게 월급조로 지급하는 면포의 품질은 조선 최고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봉급은 그대로였으며 더구나 위에서 ‘새는’ 일이 다반사여서 도감병들조차 월급만으로는 살기 어렵게 되었다. 정부는 군인들에게 장사할 수 있는 권한을 줌으로써 이 문제를 미봉했다. 군인들은 비번일 때에는 장사꾼으로 변신했고, 그 가족들은 봉급으로 받은 면포를 가공해 ‘섬유 상품’을 만드는 생산자가 되었다. 18세기 중엽, 동별영 옆 배우개에 군인들의 장사터가 생겼다. 동대문시장은 여기에서 기원(起源)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돼 정규 직업을 잃어버린 군인들은 가족들의 부업에 합세했고, 자본을 모아 광희동에 경성직뉴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가 일제 강점기 한국인 공업회사의 대표격이던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전신이다. 경성방직주식회사는 얼마 뒤 영등포에 큰 공장을 지어 이사했지만, 처음 경성직뉴회사를 만든 사람들은 자기 동네에 그대로 남아 섬유 제품 생산과 판매를 계속했다.
오늘날 광장시장에서 평화시장으로 이어지는 동대문시장 벨트는 세계 굴지의 패션 의류 타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 300년 넘은 역사의 흔적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시장 뒷골목에 아직도 남아 있는 지게 행렬이 겨우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지우는 개발이 아니라 그 자취와 함께하는 개발이어야 ‘국격(國格)’도 ‘도시 디자인의 품격’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