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대표 한상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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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실사, 실사, 실사…' .

외규장각 도서 한국측 협상대표인 한상진(韓相震)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은 말끝마다 '실사(實査)' 를 외쳤지만, 과연 국민들은 '등가(等價)교환' 을 전제로 한 실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상진 대표가 30일 오전 11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프랑스와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 제4차 협상 결과' 를 발표했다. 한대표는 지난 23~25일 프랑스 파리의 한림원(翰林院)에서 제4차 협상을 열고 프랑스측 대표인 자크 살루아 감사원 최고위원과 7개 항의 공동합의문에 서명했다. 이날 한대표는 한글과 영문으로 된 합의문을 공개했다.

한대표는 "이번 공동합의문은 외규장각 도서 문제가 발생한 지 1백35년 만에,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 한.프랑스간 협상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최초로 양국의 대표가 서명해 발표한 공식 문서" 라며 "(합리적 결론을 위한)깨끗한 논의의 시발점" 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문서는 협상대표가 정부에 하는 건의로, 최종 결정은 정부간의 합의에 의해 이뤄질 것" 이라고 밝혔다.

◇ 합의 내용=이미 보도된 대로 이번 합의의 골자는 등가교환을 전제로 한 실사다. 한국 사람으로는 한대표와 재불(在佛) 역사학자 박병선씨 외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총 2백96권)를 아직 본 사람이 없어 관련 학자들은 실사의 필요성을 진작부터 제기해 왔다.

이 점만 보면 실사는 이번 합의의 중요한 성과다. 실사는 9월부터 '유일본 우선' 원칙에 따라 시작한다.

한대표는 "우리측이 잠정적으로 집계하고 있는 유일본 목록을 실사 이전에 프랑스에 제공할 계획" 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64권을, 프랑스는 45권을 유일본으로 보고 있다. 이번 합의에 따라 앞으로 한국 학자들의 도서열람 기회도 보장된다.

또한 어람용(御覽用)의궤는 한국에 복본(複本)이 있는 비어람용 의궤와, 유일본은 동시기에 만들어진 비어람용 의궤와 '상호대여' 하기로 했다. 이런 등가교환에 대해 한대표는 "프랑스에 있는 유일본의 가치는 우리의 비어람용 의궤의 그것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어서 엄격한 의미의 등가교환은 아니다" 고 주장했다.

◇ 과제와 전망=그러나 한대표의 이번 협상 결과에는 '함정' 이 많다. 특히 공동합의문 1~3조에 등가교환의 원칙을 확정하고, 4~7조에서 실사와 그 방식을 언급함으로써 우리측에서 보면 본말(本末)이 전도된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같은 등가교환을 전제로 한 실사는 속임수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한대표는 "1993년과 2000년 한.불 정상회담에서 천명한 '교류와 대여' 의 원칙 등 정상이 위임한 권한의 한계 안에서 일해야 하는 협상대표로서는 이 원칙을 거부할 수 없었다" 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합의문은 '상호대여' 를 정상간 합의로 규정하지 않고 협상대표의 합의로 해 자국 정부에 공식 건의하는 형식을 취한, 실사 우선의 이행 프로그램으로 해석해 달라" 고 주문했다.

언뜻 실사 후 우리 정부의 대응전략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으로 비춰지지만, 외교문서의 성격을 지닌 공동합의문의 전제가 잘못된 이상 이런 낙관적 전망은 연목구어나 마찬가지다.

서울대 이태진(국사학) 교수는 "국제법상 전시(戰時)의 명백한 약탈행위를 협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이라며 "무조건적인 반환을 관철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학계의 반발이 있는 이상, 한대표의 말대로 공동합의문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일지 또 다른 혼란을 부채질하는 '풍구(風具)' 일지 여부는 앞으로 정부의 대응책에 달렸다.

맞교환 대상 도서를 소장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은 등가교환을 거듭 반대했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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