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나잇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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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명이 길면 수치(羞恥)도 많다' 는 장자(莊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고 믿는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1999년을 기준으로 남자 71.7세, 여자 79.2세로 늘었다는 소식이다(본지 26일자 26면). 10년 전보다 4년 이상, 20년 전에 비해서는 9~10년이나 늘었다고 하니 분명 희소식이다.

최근 발굴된 이집트 고왕국시대(기원전 4000년께)의 유해들을 독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평균수명이 20~30세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는 1906년에서 1910년 사이의 통계를 검토해 추정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수명(24세)과 차이날 게 없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이 태어나서 5년 이내에 죽을 확률은 무려 41%나 됐다. 절반 가까이가 다섯살을 넘기지 못한 것이다.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서민층에선 새로 태어난 동생에게 앞서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주는 일이 흔했다.

83세로 세상을 뜬 영조는 조선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다. 그가 80세를 맞아 전국의 고령자를 조사한 결과 80세 이상이 1천여명, 1백세 이상은 20여명이 나왔다. 그러나 상당수가 상을 탈 욕심에 나이를 부풀린 것으로 밝혀져 지방수령 여럿이 징계를 받았다 하니 수치를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조선사람의 생로병사』.신동원 지음)

과거의 단명(短命)은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태부족인 데다 각종 질병에 속수무책이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루지기 타령' 은 천하의 변강쇠가 죽을 때 풍두통.편두통.담결통.쌍다래끼.석서기.청맹.견비통.수전증.요통.등창.임질.탈항증.가래톳 등 무려 90여가지 병을 앓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변강쇠처럼 건강한(물론 정력과 건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도 병마에는 두손 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나이가 많다는 자체가 일종의 권력이자 권위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지게 됐다. '그 나이의 지혜를 가지지 않은 자는 그 나이의 모든 어려움을 겪는다' 는 볼테르의 경구는 되새길 만하다. 자기 나이에 맞는 '나잇값' 을 생각하자는 말이다.

그렇지만 저명한 작가가 막내동생뻘 나이의 국회의원으로부터 '아직도 철이 없는 것 같다' 는 그야말로 '철없는' 험담을 듣는 세태에선 나잇값 타령만 하기도 개운치는 않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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