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전선 반격 작전으로 북진을 거듭한 국군 3사단은 10월 1일 38선 돌파에 성공했다. 3사단 장병이 지나자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격려하고 있다. [미 육군부 자료]
12연대장에게 군위 지역의 적군 잔여 병력을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적군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곧바로 서울을 향할 것이지 왜 자꾸 옆길로 새느냐는 불만의 다른 표현이었다. 이런 경우 부하들의 사기는 꺾이게 마련이다. 모두들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던 다부동 전투를 이겨낸 역전의 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부하들의 마음, 그리고 내 가슴속의 서울은 그리움의 상징이다. 우리가 두고 왔던 가족들과 친지들이 있는 곳이다. 전쟁에서 선봉에 서고 싶다는 군인으로서의 명예심과 함께 가족을 향하는 그리움이 우리로 하여금 앞장서서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싶은 심정에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6월 25일 아침, 임진강 철교 앞에서 불안과 초조감에 젖어 있던 내게 담배 ‘럭키스트라이크’를 건넸던 인물이 미 군사고문인 로이드 로크웰 중령이었다. 그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그때까지 국군 1사단의 군사고문을 맡아 활약했던 사람이었다. 그를 교체해야 했다. 주벽(酒癖)이 문제였다. 미군 메이 대위의 충고가 컸다. “앞으로 다양한 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로크웰 중령이 너무 술을 좋아해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교체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었다. 정일권 참모총장을 통해 미 군사고문단에 로크웰의 교체를 요구했다.
국군 1사단에는 미군 군사고문이 당초 10명 선에서 20명으로 크게 늘어나 있었다. 수석 고문관을 비롯해 통신·작전·정보·군수·군단연락장교·공지(空地)연락장교·연대고문 등으로 다양했다. 국군은 전력의 상당 부분을 미군에 의존하고 있던 상태여서 내 건의를 접한 미 군사고문단은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설명을 듣고서는 바로 로크웰을 전보시키고 후임으로 헤이즈레트 중령을 보냈다.
우리는 군위에서 작전을 벌이며 북상했다. 상주에서 보은~미원을 거쳐 약 일주일 동안 속리산 일대에 숨어 있는 적을 상대로 소탕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싸움다운 싸움은 별로 없었다. 발견된 적과 산발적으로 벌이는 소규모 총격전이 작전의 전부였다.
청주에 도착했다. 충북도청에 사단 CP를 차렸다. 10월 1일에는 동해안의 국군 1군단이 드디어 38선을 넘어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도 치고 올라가야 하는데-’라는 아쉬움이 가슴을 때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싸움은 피하는 게 상수(上手)다. 명분 없는 싸움, 실속 없는 싸움, 그저 상처만 남기는 싸움은 다 피하는 게 옳다. 그래서 남과 함부로 다투지도 말고, 아예 다툼의 빌미를 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상대가 내게 싸움을 걸어왔을 때의 상황은 다르다. 그런 도전(挑戰)에는 응전(應戰)이 있어야 한다. 내 가족과 내 민족, 나아가 내 국가에 심대한 피해를 끼친 적의 도발에는 반드시 철저한 응징(膺懲)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그 사회의 힘이요, 국가의 저력이다. 그래야 내 사회와 국가를 지킬 수 있다.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군인으로서, 내 가정을 지키는 가장으로서 군인은 끝까지 전선을 사수하고 나아가 적을 섬멸하는 기개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청주에서의 작전은 별 다른 게 없었다. 그 즈음에 다부동 인근의 속칭 ‘볼링장 골짜기’인 천평동 계곡을 지켜냈던 미 25사단 27연대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 찾아 왔다. 그들은 우리 1사단에 이어 속리산 일대의 잔여 적군 병력을 소탕할 임무를 맡았다. 그들이 우리의 뒤를 받쳐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1사단은 어디로 진출할 것인가. 과연 우리에게 선봉으로 나서서 서울을 넘어 평양을 공격할 기회는 주어질 것인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날아다니는 지프’로 불린 경비행기 L5.
백선엽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