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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꿈] 3. 멕시코-영광과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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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힘센 왕조들의 등장과 이합집산으로 서구제국들이 숨가쁘게 돌아가던 16세기 초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프랑스.이탈리아.영국을 앞질러 중남미의 땅에 식민제국을 독과점으로 건설했다.

해 떨어져 신세가 처량해져 버린 오늘의 두 나라 형편은 아주 달랐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마젤란.바스코 다가마 같은 선진적인 탐험가에 이어, 콜럼버스와 코르테스.피사로의 중남미 상륙은 해양진출 경쟁에서 포르투갈에 뒤지고 있던 당시의 스페인 왕정에는 더 없는 행운을 안겨준 셈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현재의 쿠바와 산토 도밍고를 인도 땅으로 오인해 쾌재를 부르고, 코르테스의 아즈테카 점령에 이어 피사로가 잉카제국에 상륙하면서 스페인은 포르투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주민에게 값싼 옷가지나 총포를 제공하고 금.은.담배.사탕.비단 등속의 고가품을 확보하려던 경쟁이 이윽고 수천 년 대대로 이어오던 대제국들의 위대한 유산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돌이킬 수 없는 무지를 범하고야 말았다.

오오 어리석었어라 목테수마 황제여. 바다 건너에서 되돌아오리라고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그대들의 신(神) 케찰코아틀(깃털 달린 뱀)의 통분해하는 울부짖음이 들려오지 않는고! 무자비한 정복욕에 사로잡힌 코르테스 일당을 구원의 신으로 오인하다니.

만약 자기 핏줄의 역사를 그 뿌리부터 알고 있는 멕시칸이라면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의 근거로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으리라.

고대로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조상이 이룩한 문명은 지구상에 출현한 그 어떤 문명보다 독특하고 스케일이 큰 것이라는 사실이 그 첫째일 테고, 15세기 이후 수백년간 위세를 떨친 강대국 스페인을 자신의 또 다른 모국으로 맞아들이게 됐다는 점이 그 나머지일 것이다.

그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마야와 아즈테카의 혈통에다 새 어미로 들어온 백인의 피를 마구 뒤섞어 버렸는데, 16~17세기 전후로 그들의 새 어미 스페인의 위상과 목청이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쩌렁쩌렁 근사했던가는 현재 멕시코에 남아 있는 당대의 건축물들이 잘 보여준다.

멕시코시티의 드넓은 소칼로 광장을 옹위한 연방국 청사.국립궁전.최고재판소.메트로폴리탄 성당의 웅장하고도 섬세한 건축양식과 조각품들은 우리 일행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도시 곳곳에 도사린 스페인 통치시절의 오래 묵은 거리를 돌아보면서 유럽의 번화한 수도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1800년대 중반 스페인.미국의 전쟁으로 텍사스.애리조나를 비롯해 11개 주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미국과 위상이 뒤바뀔 뻔한 대국이 곧 멕시코였다는 사실은 이번에야 뒤늦게 알게 됐다.

육군 13만명에 해.공군이 수만명 정도니 우리네와 비교해 군사대국은 아니겠으나 수도의 인구 2천만명에 총인구 1억명이요, 물려받은 고대유산이 방대하니만큼 인구로 쳐서 대국이요, 가히 세계적인 문화의 대국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 나라 역사의 거칠고 도도한 흐름 또한 대국답기도 하다.

전 쟁 패배 이후 미국의 내정간섭을 물리친 뒤 1930년대에 혁명으로 사회개혁을 서둘러 현대적인 합헌국가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멕시코가 걸어온 현대사는 후발(後發) 제3세계 그 어느 나라의 숨가쁜 역사에 뒤지지 않으리라.

멕시코 현대사를 주름잡았던 아달고.판초 비야.카란사.사파타 같은 군인.혁명지도자와 민중들의 끈질긴 봉기에 관한 스토리는 이 나라의 복잡다단한 사정을 입체적으로 잘 드러내준다.

모국 스페인에는 경쟁심과 애증의 복합적인 감정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미국인을 두고는 '그링고(gringo)' 라고 비하하면서 반미감정을 노골화하고 있는 멕시칸들의 오기는 아직도 서슬이 퍼런 것일까?

멕시코시티에서 사람들 얼굴을 통해 내가 확인한 것은 그러나 과거의 번영과 관계된 그런 자부심이 아니어서 유감이었다. 서민들의 얼굴에는 친절과 낙천성이 묻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은 고단해 보였으며, 자신들이 대국 멕시코의 국민이라는 프라이드는 온데간데없이 경제 후발국의 쫓기는 그런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점차 미국화의 물결이 이 나라를 휩쓸어가고 있다는 조짐이 감지되는데, 그 조짐과 연관이 없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60년대 들어서야 제 나라의 정체성을 가까스로 확보한 쿠바가 아직껏 자본주의적인 산업화와 상업주의에 덜 노출된 반면, 멕시코는 미국적 자본주의의 질척이는 늪 속으로 깊숙하게 발을 빠뜨리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청바지.양장.양복 차림에다 푸조.도요타.현대.파나소닉.GM과 같은 국제적인 상표들이 곳곳에 넘쳐나는 멕시코의 도심은 도쿄(東京).서울.샌프란시스코의 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밀림의 황폐 속에 방치돼 있던 유적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정부 차원에서 그것들을 발굴해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마야.톨텍.올멕.아즈테카의 이끼 서린 우람한 유적들이 전 국토 곳곳에 부지기수로 흩어져 있으며, 그것도 미발굴된 데가 2천여 군데라는 사실은 고고학자뿐 아니라 나 같은 사람에게도 놀랄 일이 아닌가 싶다.

한편 내 눈으로 확인한 피라미드.왕궁과 죽은 자의 거리에서, 마야.아즈테카의 생활인과 전사들이 불과 5백년 전에 바로 그 자리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곤혹스러웠다.

그런데도 아열대의 강렬한 햇살에 노출돼 우람하기 짝이 없게 내 앞에 버티고 선 그것들은 문명의 퇴적물에 불과한 것으로, 이젠 고고학적 가치 이상의 값어치가 없어져 버렸다는 점이 내겐 더더욱 곤혹스러웠다.

천체 관측에 능해 그 시절에 벌써 1년을 3백65일로 계산해 정확하게 절기를 구분지었으며, 우주의 비의와 통한 신관(神官).사제(司祭)들은 별과 달의 운행원리를 추적해 서기 2012년 지구의 멸망일을 추론해낼 정도로 앞날을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그런 한편으로 살아 있는 적군 포로의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1년에 25만개나 돌접시에 얹어 신성한 신께 바친 아즈테카의 습속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의 반이성(反理性)도 내게는 또한 곤혹스러웠다.

끝 으로 스페인 점령자들이 땅속으로 영원히 파묻어버린 아즈테카의 수도이자 수중도시 테노치틀란이 얼마나 웅휘하며 아름다웠던지를 밝혀보고 싶어진다.

"호수 한가운데 떠있는 수도 테노치틀란은 그야말로 환상의 도시였다. 장기판처럼 사통오달로 곧게 뚫린 넓은 도로, 운하망을 따라 즐비한 6만 채가 넘는 벽돌집들, 더더욱 놀랍게도 멀리 지평선 너머로 또 다른 도시들이 아지랑이 속에 아물거렸다.

석조의 높은 탑과 건물들이 모두 물 속에서 이제 막 솟아오르고 있는 듯 보였다. 이게 다 꿈이 아닐런가. "

테노치틀란의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바라다본 풍경을 회고한 어느 신부의 기록이 그런 것이었다.

점령군대를 총지휘한 코르테스가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는 그 놀라움이 군인의 입담으로 무뚝뚝하게, 보다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 도시는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의 도시 그라나다보다 웅장하고 그라나다보다 강건한 방어시설을 갖추었으며 건축물과 주민의 수도 그라나다보다 많았다. "

멕시코 땅의 사라진 문명에 푹 잠겨 있을 때면 저 광대무변한 은하계 속의 먼지 한점으로 부유하는 우리 인간의 운명을, 그리고 하잘것없는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박영한 (소설가.동의대 한국어문학부)

사진=황지우(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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