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한국' 字 못쓰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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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에이치관광공사' '에이치방송공사' '에이치관광협회' '에이치여성재단' ….

20일 오후 속초항을 떠난 금강산관광 사업 실사단 4백56명 중에는 유난히 '에이치(H)' 로 시작하는 회사를 다니거나 단체에 소속된 사람이 많았다.

한국관광공사.한국방송공사(KBS).한국관광협회 등의 '한국' 이란 표기를 모두 영문이니셜인 '에이치' 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특히 유력한 보수단체 중 하나인 한국자유총연맹의 권정달(權正達)총재와 간부들도 '에이치자유총연맹' 이란 직함을 달고 이번 금강산 방문길에 함께 올랐다. 북한측에 보낸 관광객 명단과 이들이 목에 걸고 있는 관광증에도 '에이치' 로 시작되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통일부에 제출된 승선자 명단도 마찬가지였다. 사연인즉 북한측이 금강산관광과 관련해 '한국' 이란 표현을 일절 쓰지 말라달라고 요구했고, 이를 현대와 정부측이 수용한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1998년 11월 첫 출항 때 북한측이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이렇게 관행처럼 굳어진 것" 이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어야 할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지난해 남북 정상간의 6.15공동선언 이후에도 이런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북측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이 문제를 공론화 하지 않은 채 쉬쉬 하다 보니 이젠 공공연한 비밀이 돼버린 것이다.

입장을 바꿔 평양의 조선중앙통신 기자에게 우리가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신 '시(C)' 라고 쓰인 남한방문증을 발급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안봐도 뻔한 일 아닌가.

마침 사업주체인 현대아산과 한국관광공사는 앞으로 연간 예상 관광객의 40%인 18만명을 중.고등학생 수학여행단으로 채우겠다는 구상을 얼마전 공개했다.

이들이 처음 접하는 게 제나라 국호(國號)조차 제대로 못쓰고 영문 머릿글자를 따서 써야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사업자와 정부 당국자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남북 화해.협력의 출발점은 상호존중과 체제인정' 이라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당장 북한측과 마주앉아 이 문제를 바로잡길 바란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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