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 컬렉션] 포레 '레퀴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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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1888년 1월 16일 파리 마들렌 성당. 건축가 조제프 르슈파셰의 영결미사를 마친 후 신부가 합창대장에게 물었다.

"방금 연주한 레퀴엠은 누구의 작품인가요?"

"제가 쓴 곡입니다. " 그러자 신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포레 선생, 우린 이런 새 작품은 필요없어요. 마들렌 성당의 레퍼토리만 해도 충분합니다. "

가브리엘 포레(1845~1924)의 '레퀴엠' 은 초연 당시 '이상한 작품' 으로 취급당했다. 베르디.베를리오즈.브람스의 작품과는 달리 최후의 심판과 지옥의 공포를 묘사한 '분노의 날' 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소프라노.바리톤 독창과 혼성합창.오케스트라.오르간을 위한 감미로우면서도 단순 명료한 선율과 화음이 빚어내는 미묘한 색채의 변화가 일품이다.

포레가 그려내는 죽음의 세계는 공포가 아니라 이를 초월한 마음의 평화다. 영원한 안식과 천상의 즐거움이 주는 평온함이다.

그래서 이 곡은 '죽음의 자장가'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내면적이며 명상적인 분위기에다 80년대 이후 모더니즘의 퇴조와 맞물려 대중적 인기도 높다.

아르보 패르트.헨릭 고레츠키 등의 영적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구로 평가받기도 한다.

마들렌 성당에서 열린 포레의 장례식에서도 연주된 이 곡은 얼마전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소프라노 바버라 헨드릭스가 불러 유명해졌다. 바리톤 독창곡 '리베라 메(나를 구하소서)' 는 양윤호 감독의 영화에서도 흐른다.

미셀 르그랑 지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암브로시언 싱어스와 소프라노 바버라 보니, 바리톤 토머스 햄슨이 참가한 녹음(텔덱)은 음악의 극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면서도 온화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잘 살려낸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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