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3~5% 절상에 힘 실려 … 중국은 표정만 바꾸는 수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건설적이었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과 왕치산(王岐山) 중국 부총리의 회담 직후 워싱턴에서 나온 반응이다. 두 사람은 지난주 목요일(8일)에 만났다. 가이트너가 전격적으로 베이징을 찾았다. 인도를 방문한 뒤 홍콩을 거쳐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미 재무부 쪽은 그날 오전에서야 왕치산과 만남이 이뤄졌다고 귀띔했다. 회담 장소는 중국 정부의 청사가 아니었다. 베이징 국제공황 귀빈터미널이었다. 배석자는 양쪽 한 명씩이었다.

두 사람은 회담 직후 “글로벌 경제 이슈와 5월로 예정된 두 나라 경제전략회의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고만 발표했다. 월가 전문가들은 빙긋이 웃으며 “묘비명 같다”고 말했다. ‘0000년에 태어나 0000년까지 살다 숨져 여기에 묻히다’처럼 천편일률적인 발표문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월가는 행간에 주목했다. 위안화 절상이 임박한 것으로 풀이했다.
그 가능성은 가이트너와 왕치산의 직함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이트너는 재무장관이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특사 자격이었다. 왕치산도 금융정책 담당 부총리이면서 후진타오 국가주석 특사 신분이었다. 오바마와 후진타오가 이번 주 월요일 회담을 앞두고 특사를 보내 긴급 경제 현안(위안화 절상)을 협의한 모양새다.

회담 하루 뒤인 9일 뉴욕 타임스(NYT)는 “중국이 위안화 소폭 절상과 하루 변동폭 확대를 발표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취재원은 미 재무부 관료들이 아니었다. 중국 금융정책 담당자들의 입이었다. NYT는 “중국이 (출구전략 등) 내부 이유 때문에 위안화 절상을 하면서도 오바마 정부를 기쁘게 해주는 제스처를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이 가이트너-왕치산 회담을 통해 절상 방침을 귀띔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건설적이었다’는 반응이 그 방증이라는 얘기다.


NYT 보도대로라면 ‘더티 페그(Dirty Peg)제’의 종말이 머지않은 듯하다. 더티 페그제는 페그제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은 2008년 중반 이후 지금까지 막대한 달러 자금을 활용해 위안-달러 환율을 6.83위안 선에 꽁꽁 묶어두고 있다(그래프). 중국은 2005년 이전에도 더티 페그제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해 7월까지 10여 년 동안 위안-달러 환율을 8.2위안 선에 유지했다.

가이트너-왕치산 주고받기
최근 흐름을 보면 절상방침 귀띔설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지난주 초 미국이 환율 조작국 발표를 미뤘다. 애초 이번 주 목요일(15일)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월가 전문가들은 미·중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외 순방 중이던 가이트너가 베이징을 방문하는 이벤트가 벌어졌다. 물밑 협상 와중에 미국이 화해 제스처를 보내자 중국이 화답한 모양새다. 이후 두 달 넘게 고조되던 미·중 환율 갈등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두 나라 환율 갈등은 올 2월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바마 발언이 방아쇠였다. 그는 “5년 동안 수출을 두 배로 늘려 일자리 200만 개를 창출하겠다”며 “(이를 위해) 환율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미 의회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중국이 위안화 가치가 경제 여건에 따라 오르도록 하지 않으면 중국산에 보복관세를 물리는 법안을 만들어 의원들의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16일에는 법안이 상원에 상정됐다. 또 하루 전인 15일에는 하원의원 130명이 중국의 환율정책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가이트너와 게리 로크 상무장관에게 서한을 띄웠다.

중국의 받아 치기도 매서웠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원자바오 총리는 “자국 수출을 늘리기 위해 다른 나라 통화 절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오바마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 셈이다. 지난달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 직후에 원자바오는 “현재 환율 시스템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못 박듯이 선언해버리기도 했다. 또 중국 외교부는 “위안화 가치는 미국의 무역적자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인이면서 베이징대학 교수(금융)인 마이클 페티스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위안화 문제가 정치 이슈가 되고 있다”며 “미국은 환율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자국 내에서 정치 이슈화한 뒤 상대를 압박하는 전술을 썼다”고 말했다.

중국경제 2005년 절상 때와 꼭 닮아
그 전술로 미국은 2005년 한 차례 재미를 봤다. 그해 7월 21일 중국이 위안화 절상과 변동폭 확대를 발표했다. 10년 넘게 1달러에 8.2위안 수준에 묶여 있던 위안-달러 환율이 그날 이후 떨어지기 시작했다(위안화 가치 상승). 그해 미국이 4~5개월 동안 압박한 결과였다. 그때에도 미 의회가 앞장섰다. 중국이 환율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중국산에 대해 관세 27.5%를 물릴 수 있는 법안을 놓고 분위기를 잡아갔다.

당시 미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는 의회의 압박에도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대신 의회의 움직임을 들어 중국 쪽 양보를 촉구했다. 타협의 계기는 그때에도 후진타오 미국 방문이었다. 두 나라의 환율갈등이 고조될 때 후진타오 첫 미국 방문이 추진 중이었다. 2003년 주석에 오른 후진타오의 처음으로 미국을 찾으려고 하던 중이었다. 부시와 존 스노 당시 재무장관은 “환율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후진타오 주석이 워싱턴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결국 중국은 2005년 7월 전격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절상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후진타오 워싱턴 방문(2005년 9월)이 공식 발표됐다. 워싱턴과 베이징의 전형적인 주고받기다. 그러나 후진타오 미국 방문은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때문에 반 년 넘게 미뤄졌다.

요즘 상황은 그때와 비슷하다. 무엇보다 중국 경제 사정이 꼭 닮은 꼴이다. 2005년 그해에도 중국 경제는 과열 조짐을 보였다. 민간 기업의 설비투자가 급증하고 주택 등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다. 버블 경고가 잇따라 제기됐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지급준비율과 금리를 올리며 고삐를 죄고 있었다. 하지만 한창 달아오른 경제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위안화 절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내부적으로 위안화 절상이 필요한 순간에 중국은 후진타오 방미를 핑계 삼아 위안화 절상을 선물로 포장해 미국에 쥐어준 셈이다.

차이점이 있다. 2005년 7월 당시 중국의 긴축 정책은 무르익고 있었다. 이미 20개월 전부터 지급준비율과 금리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긴축정책은 초기 단계다. 올 들어 지급준비율을 올리기 시작했다. 인민은행은 시중에 채권을 내다팔아 위안화를 흡수하고 있다. 금리 카드는 아직 꺼내놓지도 않았다. 중국이 2005년처럼 지급준비율·금리 인상→위안화 절상 순서를 밟는다면 아직 때가 아닌 셈이다.

中, 위안화 가치 1%↑ 수출 1%↓
현재 중국은 스트레스테스트(충격평가) 중이다. 위안화 가치를 절상하면 기업 등이 받을 충격을 살펴보는 중이란 얘기다. 기계와 정보통신(IT) 등 19개 업종 1000개 기업이 평가 대상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골고루 평가 대상에 들어 있다. 인민일보에 따르면 위안화 가치가 1% 오르면 노동집약적인 산업의 수출이 1%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산업은 후진타오-원자바오가 중시하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기 때문이다.

위안화가 절상되면 중국 정부도 손해를 본다. 달러와 견준 위안화 가치가 오르면 중국 정부가 대량으로 쥐고 있는 미 재무부 채권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중국 정부는 핫머니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수 있다. 핫머니가 위안화의 점진적인 절상을 예상하고 중국으로 흘러들 가능성이 큰 탓이다.

이런 후폭풍 때문에 중국 정부 내부에서는 위안화 절상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산업과 노동 정책 담당자들은 절상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위안화 절상으로) 소비자들이 이익을 본다 해도 당장 일자리가 줄어들면 경제가 흔들리고 사회 불안이 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왕치산과 저우샤오촨 인민은행장 등을 중심으로 한 금융정책 라인은 절상을 주장했다. 이들은 “현재 환율은 위기 대응 차원에서 한시적으로 채택한 비정상적인 정책”이라며 “위기도 진정됐기 때문에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최근 베이징 분위기가 절상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기운 듯하다”고 9일 전했다.

글로벌 시장은 절상 시점을 놓고 예측 게임을 벌이고 있다. 영국계인 HSBC는 올 6월 안에 절상을 단행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 등 미국계 금융회사들은 다음 달(5월)이 유력하다는 쪽이다. 이달 27일께에 나올 중국의 스트레스테스트 최종 결과를 살펴본 뒤 5월 미·중경제전략회의를 전후해 위안화 절상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절상폭이 크지 않을 것으로 봤다. 중국이 자국 산업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위안화 가치 상승을 용인할 전망이다. 상승폭은 연간 3~5% 정도에 그칠 듯하다. 중국의 환율정책이 더티 페그제에서 더티 플로팅(Dirty Floating: 관리변동환율제)으로 조금 바뀌는 셈이다.

스티브 로치 모건스탠리 아시아태평양 담당 회장은 “중국의 절상 조치는 표정의 변화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며 “그 정도 위안화 가치 상승으로 미국이 볼 이익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미국 내부 저축과 투자를 늘려 일자리를 늘리는 전략이 좀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강남규(=dism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