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사람 잡는 루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미 국민 사이에는 “미 군용기가 1000대 넘게 격추됐다”는 식의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진화에 나섰다. “진주만 공격으로 우리 군인 2340명이 사망했고, 94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진주만에 배치된 군함 중 사용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건 단 세 척입니다. 우리가 1000대가 넘는 군용기를 잃었다는 이야기는 사실무근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우리 항공기를 얼마나 파괴했는지 모르며, 나도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을 겁니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파괴한 일본 군용기 수가 그보다 훨씬 많다는 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듣거나 읽는 모든 정보를 무조건 믿지 마라. 먼저 확인하라”고도 당부했다. 소문이 조직 구성원들의 사기를 꺾고 조직을 좀먹는 암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리더가 루머와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본보기가 될 만하다. 루머가 넘쳐나는 인터넷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금과옥조(金科玉條)임은 물론이고.

루머는 도마뱀 꼬리와 같다. 자르면 또 생겨난다. 종종 무고한 사람을 잡기도 한다. 우리는 왜 루머를 받아들일까.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루머』(2009년)에서 이를 ‘사회적 폭포 효과’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판단을 내릴 때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루머를 믿으면 어느새 따라 믿게 된다. 두 번째 요인은 ‘집단 극단화’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다 보면 이전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니 딱한 노릇이다. 하긴 블로그와 게시판·댓글 등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루머의 전파 양상을 떠올려 보라.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는 1심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흘러나온 갖가지 ‘미확인 정보’는 주워담을 길이 없다.

최근 천안함 사고와 관련된 갖가지 설(說)로 어지럽다. 야당 원내대표가 생존 병사들의 기자회견을 놓고 “어딘가 짜맞춘 듯하다”고 말한 건 그중 압권이다. 선스타인은 루머가 생기는 이유에 대해 “어떤 집단이 끔찍한 일을 당하면 구성원들은 수많은 추측을 통해 분노와 비난을 돌릴 수 있는 탈출구를 찾는다”고 말했다. 글쎄, 탈출구도 좋지만 그런 엄청난 혐의를 걸려면 확인이 먼저 아닐까.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