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정말 자신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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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혼네(本音)와 다테마에(立前)는 대강 속말과 겉말쯤으로 풀이될 텐데, 흔히 일본인의 이중성격을 야유하는 대명사처럼 쓰인다. 본심을 숨기고 밖으로 내놓는 인사말만 믿었다가는 낭패하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고려대 김현구 교수는 거기서 야유나 비판 이상의 '역사성' 을 찾으라고 권고한다. 1백여 사무라이 군벌(大名)들이 혈투를 벌이던 전국시대(1467~1568년)의 최고 덕목은 한마디로 살아남기(生殘)였다. 조카가 원군을 청하더라도 알았다고 답한 뒤, 전쟁터에서는 오히려 강한 상대에 붙어 조카를 치는 것이 그 시대의 슬픈 도리였다.

이렇게 형성된 다테마에와 혼네의 관습은 그들의 일상에 삶의 방식(modus vivendi)으로 각인됐을 터인즉, 국외자의 이중성 시비는 한낱 췌언(贅言)에 불과하리라는 것이다.

***日교과서 수정 거부 횡포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역사 교과서 왜곡 논란은 간단히 풀릴 문제가 아니다. 일본 정부의 수정 거부는 - 출판사에 대한 수정 지시 거부는 - 강자의 교만이기에 앞서 그들 나름대로 논리를 갖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과 해석이 '틀렸다' 고 우리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 일본은 '다르다' 고 응수한다.

더구나 그것이 어떤 의도를 숨긴 억지의 소산이 아니라 일본 학계의 검토를 거친 결과라고 내세우고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며, 그런데도 고쳐야 한다면 그것은 외세의 간섭에 대한 굴복이(!) 된다.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신진당 당수처럼 일본의 정치개혁을 외치며 자민당에서 뛰쳐나온 인사조차 "한국에서의 대일 비판은 한국의 잘못된 역사교육 때문" 이라고 내뱉는 마당에, 저네 역사를 저희가 볶아먹든 지져먹든 우리로서는 모르는 체하는 것이 차라리 상책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전국시대의 '원죄' 외에 현대사의 오류도 있었다. 반공 신드롬 말이다. 마오(毛)가 중국을 석권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돌발하자, 미국은 동북아 안보와 일본의 재무장을 서둘렀다.

반공의 맹우로 군국주의 세력과 제휴한 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당연히 재벌이 부활하고, 전범은 석방돼 정계로 진출했다.

그들의 혈관에 도도히 흐르는 파시스트 광기는 재무장, 헌법개정, 부전(不戰) 결의 반대를 필두로 망언, 신사참배, 교과서 왜곡 등 아주 잡다하게 터져나왔다. 독일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치 잔당은 반공의 우군이 아니라 역사 청산을 위한 '사냥감' 이었을 뿐이다. 코뮤니즘과 함께 파시즘을 억누른 독일의 점령정책은 무엇보다 유대인과 드골이 두려웠기 때문이고, 파시즘으로 코뮤니즘을 막으려던 일본의 경우는 이승만과 장제스(蔣介石)의 - 그 후계들의 - '레드 콤플렉스' 단견에도 원인이 있다.

야스쿠니(靖國)신사는 A급 전범들의 위패가 봉안된 곳이다. 일본의 눈으로는 충신의 사당이니 총리의 참배가 하등 잘못일 리가 없다. 오히려 참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실은 1985년 '전후 정치의 총결산' 을 내걸고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이미 참배한 적이 있다. 요정(了定)을 내려면 그때 냈어야 옳다. 그리고 또 저네 총리가 저희 신사에 죽어도(?) 가서 참배하겠다는 데에 우리가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교과서 왜곡을 비판하는 세력은 그래도 사회당과 공산당을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이다. 소위 지한파(知韓派) 나카소네에 대한 국내의 연줄은 많겠지만, 이들 진보세력과의 연대는 완전히 막혀 있다. 우리로서 무엇보다 먼저 반성할 점이 이 부분일 듯하다.

***본때 보이기 강력 대응을

솔직히 나는 일본의 횡포보다 우리의 대응이 더 걱정스럽다. 대통령이 일본 여당 간사장 접견을 취소했다면, 뒷날 아무리 급해도 그들을 통해 투자협력 따위를 요청하지 않을 자신이 서야 한다. 대사를 소환했으면 흐지부지 귀임시키지 말았어야 앞으로 우리의 결단이 무겁게 보인다.

그리고 일본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기 전에 저들의 기계와 부품이 없으면 공장이 멈추는 현실을 먼저 살펴야 한다. 문화개방 연기? 초등학생 학용품에서 여고생 잡지에까지 침투한 저들의 위력을 보고 나서 하는 소리인가? 정말 자신 있으면 크게 한번 '본때' 를 보이기 바란다. 그게 자신 없다면 스스로 퇴로를 막고 대드는 실수는 피하도록 하자. 제풀에 나가떨어질 때를 기다릴 만큼 상대는 벌써 사태의 결말을 읽고 있지 않는가? 이제 우리가 저들의 혼네와 다테마에 전술을 배울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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