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이념의 속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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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일상 속의 파시즘 1='나는 왜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가'. 소설가 박완서씨의 소설 제목대로 저자 임지현은 TV 외화(外畵)를 보며 '사소한' 대목에서 분노를 한다. 이를테면 남녀 주인공의 연애를 다룬 영화라 해도 남자는 반말투인 것이 보통이다.

목소리도 잔뜩 권위적이다. "그랬어□" 혹은 "그랬군. " 반면 여성의 경우 깍듯한 존대를 한다.

한데 이 영화를 원어로 보면 대화가 더없이 자연스럽다. 더빙 작업을 할 때 이땅의 '유구한' 남존여비 문화가 스며든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남녀 관계를 언어적 위계질서로 편성하는 한국사회의 파시즘적 정서' 가 문제인 것이다.

#일상 속의 파시즘 2=이번엔 1999년 고려대 노천극장. '99 콘서트 자유' 가 한창이다. 윤도현 밴드에 이어 랩가수 김진표가 나와 청중과 화답하는 노래를 한다. 그가 "외쳐 봐!" 하면 청중들이 화답을 한다.

"닥쳐 봐!" 그가 "아저씨!" 하면 역시 "닥쳐 봐!" 라는 응답이 터져 나온다.

기성세대에 직격탄을 날리던 김진표가 막상 공연 말미에 밴드 멤버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놀랐다.

반항적 기세는 간데 없고, '형님들' 을 다소곳하게 소개하는 순종적 모습이다. 저자는 말한다.

"일상적 파시즘은 한반도의 속살이다. 정신과 일상을 조직하는 권력장치로서의 파시즘이 여기에도 숨어있다. "

가늠했겠지만 이 책은 '사소한' 얘기가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인 얼굴로 존재하는 파시즘을 폭로하는 무거운 텍스트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상 속의 파시즘이란 체벌(體罰)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 하는 '저개발된 권력' 인 군부 파시즘이 아니다.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정교한 권력장치를 말한다.

문제는 진보진영 쪽이 거대담론을 언급하느라 미처 일상의 권력장치를 챙겨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의 표현대로 '혁명.민족.민주 등 추상적 신화' 에 가려 주목받지 못해온 영역이다. 각종 검사와 조회, 주훈(週訓) 등으로 채워지는 학교 교육 자체가 파시즘적 규범을 전하는 통조림 공장이고, 대학의 조직 또한 철저하게 전근대적 위계질서 속에서 움직인다. 저자의 지적은 이렇다.

"일상 속의 억압구조를 해체하지 않는 한, 사회의 변화란 참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 집단적 코드를 공유하는 문화적 타성들이 체제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임지현의 주장은 실은 학계에서 한차례 논쟁으로 불거졌다.

'극우와 내통하는 진보 허무주의' '이광수 민족개조론의 또 다른 버전' 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적전 분열' 을 염려한 진보진영 쪽의 지적일 게다. 하지만 임지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단호해졌다.

자신의 주장은 '내 탓이요' 라는 단순한 회개운동이 아니라는 것, 외려 진정한 해방된 삶을 위한 제안이자, 파시즘의 기반을 공략하려는 현실투쟁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알고 보면 설득력이 높다. 근대 이전의 가치를 이상하게 파행적인 형태로 온존시켜온 사회구조가 그렇고, 걸핏하면 '국민적 합의' 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판단을 법과 제도의 틀에 가두려는 억압적 풍토 때문이다.

또 하나 저자의 일상 속 파시즘론은 실은 '전면적 해방' 을 요구하는 급(急)진보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이런 요소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을 촉발시켰던 서구의 68혁명에 대한 저자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녹색운동.페미니즘 운동 등 진정한 자율성을 목표로 한 68혁명 말이다. 또 전시대의 마르크시즘이 하부구조 개혁 우선에 치중하다 결국은 실패했던 과오를 살펴보자면 이 시대는 전면적 혁명을 새롭게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욱 새롭게 다가선다.

의도적으로 논문의 저술방식을 버리고 자유로운 스타일의 에세이풍으로 쓰여졌으나 추상도가 높은 학술서인 이 책의 백미는 따로 있다.

제3부에 실린 글 '20세기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대중화, 대중의 역사화' 등의 글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진보를 향한 무한질주)로 내세우지 말고, 앞으로의 시대는 디오니소스(술을 마실줄 아는 이성)로 해야 할 것이라는 제안 등이 신선하게 담겨있다.

역사학도로는 보기 드물게 빼어난 수사(修辭)와 훌륭한 성찰을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책은 전반적으로 이념의 껍데기가 아닌 속살을 드러내려는 젊은 학자의 시도가 비교적 만족스럽게 읽힌다.

조우석 기자

*** 저자 임지현은…

*** 저자 임지현은…

『이념의 속살』을 읽으며 그의 이전 저술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떠올렸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예민한 주제인 민족주의가 신화에 불과하며, 그것이 남과 북 모두에게 체제유지의 버팀목으로 작용하는 측면을 공격한 책이 그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민족주의의 냄새나는 속살' 을 드러낸데 이어, 『이념의 속살』은 80년대 이후 보혁(保革)논쟁의 미진했던 대목을 새로 짚어본 것이다.

그의 첫 책은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이 책은 현실사회주의의 부패한 속살을 점검해본 저술이었다. 그렇다면 임지현의 저작물들은 진보이념, 민족주의 등 우리사회의 가려진 신화에 대한 도전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얘기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이런 우상파괴가 보수적 입장에서의 수박 겉핥기 식 문제제기라기 보다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내부고발자의 시선' 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체제 내부로 끌어들여 '함몰' 시키는 체제적 구심력이 유난히 강한 한국사회 속에서 그의 작업은 용기로 평가돼야 할지도 모른다. 그에게 '적' 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지만, 저술 자체로 판단컨대, 신뢰할 만한 연구자임에 틀림이 없다.

임지현(43)은 역사학과 철학을 같이 공부했다. 국내에서 서양사상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폴란드 대학 등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다. 현재는 한양대 사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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