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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칼럼] 개혁 파시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99년 당시 홍석현 사장이 검찰에 구속됐을 때 기자들이 검찰청사 앞에서 '홍사장 힘내세요!' 라고 외쳤다.

기자들의 뜻은 '정권이 어떤 타협을 제의해도 굴하지 말라' 는 것이었고 이를 타언론사에 설명했다. 그러나 중앙일보 탄압에 나섰던 정권과 이에 맞장구를 쳤던 일부 언론들은 말까지 '사장님 힘내세요!' 로 바꿔가며 중앙일보 기자들을 사주의 충복으로 전락시켰다. "

중앙일보 기자노조가 발행한 4일자 '중앙노보' 의 기사중 일부다. 좀더 인용해보자. "과연 누가 언론개혁의 대상인가.

정권에 굴하지 말라고 사주에게 요구하는 언론인가, 아니면 정권에 입을 맞추는 기생언론인가. " 사장이나 국장 호칭에 '님' 자를 붙이지 않는 게 언론사 관행이다.

그때 기자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아! 기자도 타언론.타기자들에 의해 이렇게 왜곡되고 결딴이 날 수 있구나. 기자들이 이렇게 당하는데 보통사람들이 얼마나 언론피해를 받았겠는가. 기사 한줄을 쓸 때도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게 언론개혁이라고 모두들 다짐했다.

"기자들이 사주의 사병이 되어버린 것은 오래전의 일. '중앙일보' 기자들이 그 커다란 건물에 '언론탄압 중단하라' 는 글자를 적은 거대한 넝마를 걸어놓고 탈세로 구속되는 사주의 발자취를 좇아 검찰청에까지 따라가 '사장님 힘내세요' 라 외친 것은 우리 언론이 20세기를 마감하며 연출한 마지막 희극이었다. " 바로 어제치 한겨레신문에 진중권이라는 사람이 조선일보기자들의 세무조사관련 성명서를 야유조로 비판하며 쓴 글의 일부다.

좀더 인용하면, "전투적 언어를 구사하며 사주의 총폭탄이 되어 한몸 초개같이 버리는 이들의 모습, 수령의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체주의 정당에서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 앞의 중앙노보의 설명 없이 뒷글을 읽는 독자라면 중앙.조선의 기자들은 영락없이 사주의 주구(走狗)고 조폭이다.

며칠 전 작가 이문열이 언론과 정권이 충돌로 승패를 가늠하려 한다면 언론쪽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는 요지로 세무조사의 언론자유 침해 개연성을 지적했다.

여기에 추미애라는 여당의원이 "기득권 언론을 통해 성장한 지식인들이 지식을 팔아 권력에 아양을 떠는 것은 비난받을 일" 이라며 작가가 야당의 국가혁신위에 가담한 것 자체가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증거라고 했다.

그러나 작가는 국가혁신위에 몸담은 적도 그런 제의조차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법조 출신 여당 정치인의 언어폭력뿐만 아니라 그녀가 동원하는 또다른 매카시적 수법에 놀란다.

야당의 무슨 위원회에 가담하면 중죄가 된다는 발상 속에는 그들이 늘상 주장했던 수구세력들의 빨갱이 몰이 수법과 뭐가 다른가. 야당이 무슨 간첩집단인가. 그 위원회만 가담하면 권력의 아첨꾼으로 모는 그 발상이 구시대 수법과 별로 다르지 않다.

최근 한 언론 관련 시민단체의 무슨 총장이라는 사람이 TV토론에서 전직 기자임을 내세우며 요즘 기자들은 사주가 편집국에 나타나면 커피 심부름을 할 만큼 타락했다고 한탄했다.

그가 어느 신문사에서 목격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매카시적 수법이다. 신문사 사장이든 회장이든 그 또한 언론인이다. 후배기자가 선배 언론인과 시국대화를 하며 커피 한잔을 뽑아 마시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지 티켓다방의 여종업원처럼 비하시켜 매도할 일이 아니다.

격렬한 언어폭력으로 기자들을 조폭, 또는 충복으로 끌어내리고 그들과 어긋나는 글을 쓰는 지식인들을 권력의 아첨꾼으로 몰아가는 이들 개혁세력들의 저의는 무엇인가.

한때 그들이 억울하게 당했다고 외쳐왔던 잘못된 기성.보수의 폭력방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수법으로 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의사들을 도둑으로 몰아 의료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사립학교 교주들을 파렴치범으로 몰아 학교 개혁을 압박하고 언론사 사주와 기자들을 조폭으로 둔갑시켜 언론개혁을 외쳐대는 또 하나의 파시즘 아닌가.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무엇인가. 무주공산의 만민평등사회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권력 파시즘의 등장인가.

" '국민의 정부' 라는 수사는 이 정권이 '국민' 의 이름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박정희시대의 동원체제를 계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일상적 파시즘 척결을 꾸준히 제기하는 한양대 임지현교수가 『이념의 속살』이란 책에서 지적한 분석이다.

이른바 민주개혁세력들이 성취코자 하는 여러 시도들이 민주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또 다른 파시즘의 대두, 개혁 파시즘의 일상화임을 나는 경고한다.

권영빈 <중앙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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