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출판시장의 흐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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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디지털 혁명의 파고는 '책의 세계' 를 크게 뒤흔들어놓고 있다.

지난해의 이른바 'e-북 열풍' 이 책의 생산과 편집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 지각변동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이었다면 올해에는 또 다른 혁명적 변화, 즉 유통혁명의 파고가 출판시장을 엄습했다. 그 변화의 정점에 인터넷 서점이라는 기술이 자리잡고 있다.

모든 기술은 검의 양날처럼 선과 악, 은총과 저주, 희망과 불안이 함께 한다. 인터넷 서점은 정보의 속도나 양, 검색과 고객별 1대1 맞춤서비스, 커뮤니티 등 놀라운 장점을 가지고 독자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인터넷 서점들은 이런 장점들보다 가격파괴라는 무기를 주로 경쟁적으로 휘두르며 시장을 확대하고 있어 기존 유통조직을 급속하게 붕괴시키고 있다.

이미 중소형 서점들은 1년에 1천개 이상 문을 닫고 있다.

인터넷 서점들의 위협에 자극받은 교보문고.영풍문고 등 대형 오프라인 서점들마저 3백~5백종의 베스트셀러를 한시적이나마 30%까지 할인판매하기 시작해 도서정가제가 실제적으로 완전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양질의 내용과 수준 높은 편집으로 평가받아야 할 책이 오로지 할인이라는 가격경쟁력에만 좌우되고 있어 베스트셀러와 팔리지 않는 책의 양극화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다.

올해에도『상도』와『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와 같은 책은 벌써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지만 인문서와 문학서 등 교양서들은 침체의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며 일부 책들의 반품률은 40% 이상으로 치솟았다.

또 베스트셀러에 대거 올라 있는 일부 감각적인 소설들의 배후에는 자기 책 사재기라는 부정적인 얼굴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상위 3백종이 전체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일부 출판사는 다소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 무리하게 자사 책 사재기와 같은 비도덕적 행위마저 저지르며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나서기도 했다.

독자들의 시대적 욕구에 적절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려다 보니 사재기라는 '이벤트' 뿐만 아니라 광고, 홍보, 출고가 인하, 무료 증정, 담당자 향응, 인간적 관계, 인맥 등이 모두 동원된다.

이렇게 해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더라도 출판사에는 '빛 좋은 개살구' 가 되기 십상이다.

더구나 인터넷 서점 등의 할인공세에 시달리던 중.대형서점들마저 곧 할인판매에 돌입할 태세다. 그런 구도에서는 출판사.서점.독자들 사이의 불신의 폭이 커지고 상업적인 책이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 위기의 국면에도 결국 살아남는 책은 그 존재가치가 분명한 책일 뿐이다. 그 증거가 최근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과학서적과, 양서여야만 베스트셀러에 들어가기 쉬운 아동서적 분야에서 드러나고 있다.

결국 상반기 출판시장에서 드러난 결론은 시시각각 녹아내리는 빙산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심금을 울리는 양서는 반드시 독자가 있다' 는 확신을 가진 저자와 편집자의 피나는 노력이 밴 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뿐이다.

이 우울한 올해 상반기 독서시장의 한가운데서 '중앙일보 좋은 책 100선' 이 신선한 청량제 역할을 하길 바란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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