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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명인] 각자장 오옥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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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너를 새긴다. 너의 이름 새긴다. 푸르디 푸른 칼끝 한자 한자 넋을 달궈 넋에 새긴다…. "

청록파 시인 박두진은 1975년 시 '육비명(肉碑銘)' 에서 각자장(刻字匠.중요 무형문화재 제106호) 철재 오옥진(66.서울시 마포구 용강동.02-716-2374)씨의 예술세계를 한껏 치켜세웠다.

4대째 각자를 계승해온 집안 출신 오씨는 스러져가는 각자에 새로운 기법과 해석을 도입하며 예술로 승화시키는데 일생을 바쳤다.

가세가 기울어 학교를 중퇴한 오씨는 제대 후 목공예로 생계를 이어갔다. 동아방송 영선실에 근무하던 중 이희승.천관우 선생 등 대학자들의 고가구를 고쳐주면서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각자장이 되기로 결심한 오씨는 1970년 청주에 살던 신학균씨를 찾아가 정식으로 배우게 된다. 각자 기술뿐 아니라 한학(漢學)과 서예를 각각 청명(靑溟) 임창순 선생과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에게 사사했다. 또한 이겸로.이가원.이종석 선생 등 당대 대가들을 찾아 다니며 전통 문화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그리고 79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목판으로 복원하는데 성공, 각자장 경력에 한 획을 그었다.

각자는 나무나 돌 등에 글자를 새기는 작업을 말한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을 만들어낸 우리 민족은 뛰어난 손재주로 예부터 목판인쇄에 능했다. 팔도 곳곳에는 역사가 살아숨쉬는 금석문(金石文)이 널려있고 옛 건물에는 명필들의 현판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 각자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목판인쇄의 쇠퇴로 수요가 줄어 근근히 명을 이어오다가 오씨의 손끝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각자는 인내와 섬세한 손놀림, 고전에 대한 지식이 어우러진 작업이다.

글자 한 획마다 칼을 망치로 내리쳐 만드는 과정에서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오씨의 왼손 손가락 두개는 신경을 다쳐 제대로 구부러지지 않고 오른손 집게손가락 첫마디 끝부분이 잘려나간 데서도 각자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작업이인지 엿볼 수 있다.

오씨는 "칼질만 잘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어요. 써준 글자 모양에 개의치 말고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며 "각자는 도장 파듯이 기계적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안목으로 글씨를 목판에 맞게 균형을 잡아 새겨나가는 작업" 이라고 풀이한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도 그대로 파내려가면 오히려 어설프게 보일 수 있다. 유려하고 힘있는 필체의 맛을 살리려면 각자장의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무 소재로는 양지바른 땅에서 곧게 자란 소나무 춘양목(春陽木)을 제일로 친다. 5~6년간 응달에서 말린 나무를 톱과 대패로 다듬은 뒤 글자를 쓴 종이를 붙이고 칼과 망치로 새긴다.

새겨 파는 음각은 각자의 기본이며 서체에 따라 기법이 조금씩 다르다. 예서(隸書)는 조금 빠른 속도로 넓게 파며 대담한 칼 움직임이 필요하다. 해서(楷書)는 반대로 느리고 가벼우면서도 부드럽게 파야 한다. 행서.초서(行書.草書)는 가급적 빨리 칼을 움직여야만 비백(飛白.붓끝이 갈라지는 부분)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가장 까다롭다는 한글은 단순히 모음.자음이 반복된 형태로 보지 말고 한획이 모두 살아움직이는 기분을 내야 한다.

돋워 파는 양각은 음각의 기법을 기본적으로 사용하되 바탕 면적과 글자의 공간 분배를 고려해야 한다. 인출(印出)을 위한 목판은 반서각(反書刻.글자를 뒤집어 새김)한다.

오씨는 뛰어난 솜씨로 경복궁.창경궁.송광사.화엄사 등 고건물의 현판을 도맡아 만들었다. 독립기념관.현충사 등 중요 공공건물 현판도 그의 작품이다.

오씨는 전통 각자를 보존하는데 그치지 않고 각자를 현대적 감각에 맞는 창조적 예술 작업으로 발전시켰다. 오씨는 갑골문(甲骨文)의 획을 사람 모양으로 재구성한 서체를 개발, 남의 글씨를 받아 글자를 새기는 수동적 각자장의 개념을 깨뜨렸다.

한국전쟁에서 시력을 잃은 오른쪽 눈의 피로가 심해 요즈음은 개인 창작작업과 국가에서 주문한 작업 외에는 손을 안댄다. 천관우.장우성.김동리 등 현대사에서 명필로 알려진 2백명의 글씨를 후계자로 삼은 맏아들 오윤영(41)씨와 함께 목판에 새기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여담 한가지.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다섯명의 대통령들의 휘호(揮毫)를 현판으로 제작했던 오씨는 다들 그만그만한 수준이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솜씨가 그 중 낫다고 한다.

이철재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관

97년 문을 연 서울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관은 전통문화를 만끽하고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기능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12명과 8개 예능 중요무형문화재 단체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아 전통문화 전수.보급에 힘쓰고 있다.

전수관내 민속극장에서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30분 예능 무형문화재 보유.전승자들이 '풍류한마당' 에서 각자의 솜씨를 자랑한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는 주제별 전통문화 기획전이 열린다.

현재 오씨와 제자들의 작품 전시회 '철재각연전' 이 22일까지 열린다. 25일부터는 산림청 국립수목원 박물관(광릉 수목원.031-540-1114)으로 장소를 옮겨 한달간 전시회를 갖는다.

전통문화 강습과 오지.장애학생들을 위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문의 02-566-5951~2)도 마련됐다.

자세한 정보는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홈페이지(http://www.fpcp.or.kr)나 자동응답전화(02-566-6300)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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