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탕정 명암5리(트라팰리스) 백성제 이장은 “고층아파트 이장의 하는 일이 다양하다”고 말했다.
백성제(61) 이장이 지난달 31일 트라팰리스 아파트 세대 내 방송을 통해 공지사항을 알렸다. 백 이장의 업무 중 하나가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물품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이다. 트라팰리스는 행정구역상 아산시 탕정면 명암5리다.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 사원아파트로 지어진 ‘고급 아파트’에 이장이 등장한 것은 지난 2월. 1년 전 입주한 2225세대의 대규모 아파트를 별도 리(里)로 나누면서 이장이 생긴 것이다.
그는 32년간 근무한 포항의 포스코에서 정년퇴직하고 딸과 사위(모두 삼성전자 근무)를 따라 아산에 올라왔다. 사무직에 종사한 그는 컴퓨터 등에 능숙하다. 그 덕에 이곳 어버이방(경로당)의 총무 일을 맡고 있다 주위 추천으로 엉겁결에 이장이 됐다. 그는 “나이 든 사람이 적은 아파트라 이장을 맡을 사람이 드물어 내가 하게 됐다”고 말했다.
트라팰리스 이장은 다른 이장과 일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논둑 길을 오가며 주민을 만나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민을 만난다. 이장 ‘취임’ 초기 세대명부 확인 업무가 떨어졌다. 주민들을 직접 만나 조사할 욕심으로 각 동(총 12개동)에 오를 생각을 했다. 그러나 금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35층 꼭대기층부터 각 세대(각층 5세대)를 호출하면서 내려오는데 꼬박 3시간이 걸렸다. 그마저 부재율이 70~80%나 돼 천만다행(?)이었다.
다른 이장과 하는 일도 다르다. 이장은 마을 전체를 오가며 누구네 잔치가 열리나 등 대소사에 모두 참견하는 감초같은 존재가 아닌가. 무엇보다 영농 업무를 잘 처리해야 한다. 영농자금대출 주선, 비료 등 농자재 공급 등.
그러나 트라팰리스 이장은 거의 컴퓨터를 통해 업무를 본다. 아파트 홈페이지에는 ‘명암5리’코너가 따로 있다. “이장이란 소리가 정겹다. 어릴 적 살던 시골 생각이 나 뭉클했다”는 글이 우선 눈에 띈다. ‘이장에 바란다’엔 수시로 민원성 글이 오른다. 시내버스가 많이 오게 해달라. 서울 가는 고속버스를 자주 운행하게 해라, 주위에 체육시설 좀 들어오게 해라 등.
박 이장은 빠짐없이 회신한다. “주민 여러분의 입과 발이 될 수 있도록 많은 힘과 격려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산시에 간곡히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새 봄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는 2, 3월 두 번 면사무소에서 열리는 이장회의에 참석했다. 동료 이장들이 “트라팰리스는 아파트라 할 일이 없어 좋겠다”고 말해 진짜 그런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행정부서와 연결되는 통로가 입주자대표회장이 아니라 이장임을 아는 주민들이 아산시에 바라는 내용을 모두 그에게 쏟아낸다. 그는 “입주자대표회장이 아파트 내부 생활 및 살림을 맡아 하고 이장은 행정기관과 주민을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걱정이 하나 있다. 이장을 도와줄 반장에 선뜻 나서는 주민이 없다. 한개 동에 한 명씩 12명을 뽑아야 하는데 현재 4명만이 확보된 상태다. 젊은 입주자들이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탕정면에선 트라팰리스 세대수가 너무 많아 2개 리를 더 늘려 이장 2명을 더 두려고 한다. 트라팰리스는 2225세대로 탕정면 전체 세대수의 20%, 인구는 7500여 명으로 면의38% 수준이다. 이장에겐 월 20만원 활동비에 회의 참석 수당 2만원이 나온다.
글·사진= 조한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