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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결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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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거대한 토끼가 도시를 누빈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영화 '고질라' 의 한 장면 같다. 곧 레이저총을 든 여전사가 나타나고 그녀의 총에 맞은 토끼는 다시 작고 얌전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관객들은 씨익 하고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에 열광적으로 환호한다. 지난 4~9일 프랑스 안시에서 열렸던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2001의 트레일러(trailer:본 상영 전에 틀어주는 짤막한 예고편)다.

페스티벌 기간에 알프스를 낀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 안시는 온통 ' 애니메이션 '이라는 거대한 토끼에게 점령당한 듯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작가.제작자.취재진 등이 커다란 유니언 잭(영국 국기)이 걸린 봉리유 센터의 붉은 계단을 가득 메웠다. 유니언 잭은 이번 페스티벌의 특별전인 '영국 애니메이션 회고전' 을 상징하는 것.

총 1천70편의 작품이 접수돼 본선에서 2백42편이 자웅을 겨뤘다. 1999년 이성강 감독의 '덤불 속의 재' 가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던 한국은 올해 '오토' (전하목.윤도익), '그랜드마' (조성연)등 두 편이 단편 경쟁 부문에 오르는 등 총 7편이 본선에 나가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줬다.

학생 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던 '프린스 앤 프린세스' 의 감독 미셸 오슬로는 "소재나 기법이 매우 다양해졌으며 무엇보다 제작 편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등 '애니메이션의 대중화' 가 이뤄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고 평했다.

실제로 아직까지 셀이나 3D가 주종을 이루는 국내에 비해 본선 진출작의 상당수가 페인팅 온 글래스.모래.인형.클레이메이션 등 각양각색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또 소재는 인터넷의 보편화 때문인지 폭력.엽기적인 요소를 유머러스하게 처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단편 부문 대상은 마이클 두독 드 비트(네덜란드)의 '아빠와 딸' 이 차지해 올해 아카데미상과 안시 그랑프리를 같은 해에 거머쥐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장편 부문 대상은 국내에 개봉했던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의 빌 플림튼이 선보인 '돌연변이 외계인' 에게 돌아갔다. 또 아르튀르 드 팽(프랑스)의 '제럴딘' 과 폴 드리센의 빙산을 본 소년' (캐나다)이 각각 학생 부문 최우수상과 단편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TV필름 부문 대상은 스테판 오비에르.뱅상 파타르(벨기에)의 '케이크' 가 받았다.

행사 기간에 안시를 찾은 유명 인사들은 팬 사인회와 콘퍼런스.인터뷰 등을 소화하느라 눈코뜰 새 없었다. 심사위원을 맡은 미셸 오슬로나 장편 부문에 출품한 빌 플림튼은 물론, 프레데릭 백이라는 거장을 배출한 캐나다 국립영화국(NFBC)의 디렉터 자크 드뤼엥, '월레스와 그로밋' '치킨 런' 을 만든 아드먼 스튜디오의 대표 피터 로드 등이 얼굴을 비춰 팬들을 흥분케 했다.

아드먼 스튜디오는 '영국 애니메이션 회고전' 과 나란히 '아드먼 앤솔로지' 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고풍스러운 안시성(城)에서 제작 과정을 설명하는 전시회를 여는 등 올해로 30년을 맞는 아드먼의 역사를 정리했다.

'치킨 런' 은 행사 다섯째날인 8일 야외 대형스크린에서 상영됐다. 특별 게스트로 초청된 피터 로드는 인터뷰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쁘고 영광스럽다" 며 "특별 게스트라니 마치 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된 것 같다" 고 익살을 떨었다.

디즈니 같은 거대자본을 제외한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흐름을 한눈에 짚어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실험성과 아이디어를 갖춘 '보물' 같은 단편을 골라내는 재미 등이 안시 페스티벌이 40여년간 명성을 자랑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인 듯했다.

이를 감안하면 제3국의 작품이라도 영어 자막 대신 프랑스어 자막을 태연히 삽입하는 자국 중심주의는 너그럽게 눈감아줄 수 있었다.

안시(프랑스)=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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