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약수' 이웃에 베푼 노부부 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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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무학산 자락인 경남 마산시 유록동 주택가.'최영호'라는 문패가 붙은 단독주택 대문으로 물통을 든 사람들이 끝없이 드나든다.

아예 차량 트렁크에서 5∼6개의 대형 물통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대문 안 10평쯤 되는 마당에는 고무호스 끝에 수도꼭지가 달린 약수터가 있다.10여 개의 물통이 줄서 있고 사람들은 순서를 기다렸다가 물을 받아간다.이 집의 대문은 24시간 열려 있다.

이 집의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가는 사람은 하루 1천 여명 선.주로 유록동 ·월영동 등 마산시내서 오지만 물 좋다는 소문을 듣고 창원 ·고성 등에서도 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집 약수터를 이용하지만 주인 최영호(崔永鎬 ·72) ·서두순(徐斗順 ·67)씨 부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노부부가 가급적 사람들과 얼굴 마주치기를 피하기 때문이다.마당 청소도 주로 사람들이 없을 때 한다.

"물 떠가는 사람들이 우리 얼굴 보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래.조용히 베푸는 재미지 뭐."

이들 부부가 물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은 1970년부터.진주 해인대 임학과를 늦깎이로 졸업한 崔씨가 고향(진주시 문산읍)의 논 ·밭을 팔아 무학산 기슭 2만 여평에 관상수 농장을 차렸다.

나무에 물주기 위해 농장에 있던 약수터에서 지금의 집까지 7백여m구간에 지름 50㎜짜리 관을 묻어 집안에 약수터를 만들었다.

"고지대인 농장주변에는 상수도 혜택을 못보는 집들이 너무 많았어.그래서 물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온 거야.별것도 아닌데…."

당시 崔씨 농장 주변에는 일본에 징용 갔다가 귀국했거나 피난민의 판자촌이 즐비했었다.지금도 崔씨 집 근처에는 마산의 마지막 판자촌 1백여 가구가 남아있다.

崔씨는 약수 물을 나눠주기 위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난다.수원(水源)이 있는 곳에 설치해 놓은 3개의 대형 물통 중 가득 찬 물통의 꼭지는 틀고 물이 없는 물통의 꼭지를 잠그기 위해서다.

崔씨는 오전 3시,오전 8시,낮 12시,오후 4시,오후 8시 등 하루 4번씩 어김 없이 농장 꼭대기를 오르내린다.한번 오가는데 1시간쯤 걸리지만 물을 받아가며 흐뭇해 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면 힘드는 줄 모른다.그래서 칠흑 같은 어둠도,세찬 비바람도 崔씨의 발길을 붙들어 매지 못한다.

"약수터 관리하느라 지금까지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관광도 한 번도 못했어.물 뜨려고 왔다가 실망해서 갈 사람 생각하면 떠날 수가 없어."

집안 약수터를 오가는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집안의 화분을 가져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그네가 주인한테 덕 보여 주는 것은 없는 법"이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약수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자 마산시는 崔씨 집 앞에 수질검사표를 붙여놓고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있다.지난해 5월에는 봉사부문 수상자로 선정해 '시민이 드리는 상'을 전달했다.

이들 부부는 물만 나눠 먹은 것이 아니다.처음에는 약수 물을 뜨러오는 피난민에게 설탕·밀가루까지 나눠줬다.농장수입이 짭짤했기에 가능했다.

약수 물을 떠가는 사람들이 명절 때면 간혹 선물을 가지고 오지만 받지 않는다."베푸는 재미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약수 물을 나눠 먹겠다"는 노부부의 희망은 소박하기만 하다.

"물통을 미리 씻어 와 낭비하는 물을 줄였으면 좋겠어."

김상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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