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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고려 무인 이야기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탄력적인 서술방식을 고려 무신정권 1백년사에 도입해본 실험적인 역사 에세이. ' 읽다 보면 독자를 주눅들게 만드는 역사학 논문과 견줘 친절함은 비할 바 없고 정보량도 밀리지 않으며, 역사소설의 픽션이나 TV 사극과는 크게 구분되는 책이 『고려 무인 이야기』이다. 학교시절 교과서에서 스치고 말았던 12세기 후반 한국 중세사의 무신정권 시기를 사람 냄새 물씬한 이야기로 다시 들려주는 데 성공적인 것도 당연하다.

예를 들어보자. 정중부 일행에 의해 하루아침에 폐위된 의종. 평소 질탕한 술자리를 좋아했고 예술가적 기질을 가졌던 인물로 묘사되는 그는 신하들이 도륙되는 쿠데타와 연금 상황에서도 태연히 술과 음악을 즐긴 뒤 침소에 드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84쪽)

이번엔 정중부. 요즘으로 치면 대위급의 하급장교 이의방 등 3인방과 쿠데타에 나섰으나 알고 보면 '은인자중의 보수적 장수' 이었던 대장군(지금의 중장급) 정중부의 사람됨은 이렇다. "7척이 넘은 키에 흰 얼굴의 그는 수염이 아름다웠다. 상대에게 두려움을 일으킬 정도의 풍채를 가진 그는 무신란 당시 65세로 중후한 분위기를 풍겼다. " (183쪽)

해주 지방의 한미한 집안 출신인 정중부는 10대에 군인이 된 뒤 나이 40세까지 20년 동안 대정(원사나 준위)에 머물렀다. 초고속 승진은 왕권 강화를 노리던 의종이 즉위한 뒤 친위대 양성에 열을 올리면서부터였다. 거사 이후 막강한 실력자로 등장한 그는 당시 여느 문벌처럼 토지 늘리기 등 재산증식에 열을 올렸다. 정중부와 아들(정균), 사위(송유인)와 그의 아들(송군수) 등 4부자를 고려인들이 '4공(公)' 이라 비아냥거린 것도 그 즈음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모두 비참하게 죽는다. 새파란 26세 청년 장군 경대승이 이끄는 결사대에 머리가 잘려 부자의 머리가 나란히 개경(개성) 시내에 내걸리며 '권불(權不)5년' 을 누렸을 뿐이다.

이런 정보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픽션일까? 사실(事實)인진 몰라도 모두 사실(史實)임은 분명하다. 사서인 '고려사' '고려사 절요' 에 등장하는 정보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정보로 뼈대를 세우고, '구성적 상상력' 을 채워넣어 '무신정권이라는 건축물' 을 만들어 보인 것이 이번 역사 에세이다. 그 결과는 대중적 역사서의 새로운 모델이다.

고려 무신정권 1백년은 고려사의 분수령. 고려사의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중대한 시기이다. 역사상 매우 역동적인 이 시기는 서양 중세 봉건제나 일본 막부정권과도 다른 구조지만, 이를 소재로 한 변변한 역사소설이나 드라마 한편 나오지 않았다. 무신란은 역성(易姓)혁명도 아니고, 현대식 쿠데타와도 구분되지만, 권력을 쥔 역대 실력자들 11명 중 왕위에 오른 이는 누구도 오를 생각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의문의 덩어리' 는 학계의 연구 미흡 탓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기껏 무인정권을 현대사의 군부독재에 대입시킨다. 그리곤 나쁜 시대라는 선입견을 갖는다. 말도 안된다. 늑대는 악한 동물이고, 개는 선한 동물이라 해서 연구의 기준으로 삼는 동물학자를 보았는가□"

해직교사 출신인 저자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보면서 자신도 그런 역사 에세이에 도전해 보겠다는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정중부.이의방.경대승.이의민 '4명의 실력자' 들을 그린 이번 책은 무인정권 성립시기에 국한됐다. 이후 두 권의 책을 통해 최충헌 이후 최씨 정권과 삼별초의 난 시기를 다루게 된다.

그러나 이번 책이 만족도 1백%일 수는 없다. 사료의 빈곤 때문인지 정작 생생한 묘사가 필요한 대목은 스치고 지나간다. 공주를 점령했던 망이.망소이의 난 대목은 당시 평민들의 정서 묘사를 위해 결정적인데, 그 두명을 형제로 설정하는 시도 외에는 변변치가 않다. 시대상 전체가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조우석 기자

*** 어떤 장르의 책인가

'물건' 은 기다린다고 태어나지는 것이 아니다. 『고려 무인 이야기』의 절반의 공은 실은 편집자의 것이다.

본디 뻣뻣한 역사책 원고를 들고온 저자와 머리를 맞대고 수차례 밀고 당김을 거듭했다.

심지어 무신정권 소재를 가지고 완전한 역사 픽션까지 만들어 보았다가,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폐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공이 들어간 이 책은 지난해 나온 역사책 『조광조』(정두희 지음.아카넷)보다 훨씬 부드럽게 읽힌다. 굳이 비교하자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슬픈 궁예』가 좋을 듯싶다.

이 책 역시 '소설과 역사의 경계' 에 서있는 역사 에세이로 분류할 만하다. 지난 주 리뷰한 이덕일의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상대적으로 조금 무거운 서술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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