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기업을 내쫓는 나라가 돼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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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나마 우리 경제를 끌어온 수출마저 반도체값 폭락과 철강.조선산업 등에 대한 통상압력 강화로 향후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재계.노동계는 힘을 모으기는커녕 오히려 기업 규제와 노사 관계를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의 한 대표적인 대기업에선 "이렇게 간섭받으며 기업할 바에야 본사를 아예 미국으로 옮기자" 는 얘기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설마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기야 할까마는 오죽했으면 이런 발상이 나올까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경영 환경이 좋지 않다는 것은 국내외의 각종 조사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다. 미국 포브스지는 지난달 25개국을 대상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순위를 매기면서 한국을 말레이시아.중국보다 못한 18위에 올렸으며,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기업하기 좋은 정도' 에서 세계 49개국 중 31위로 평가했다.

준조세 등의 부담이 없어 국내 기업보다 경영여건이 훨씬 좋은 외국인 투자 기업들도 절반 가량이 한국 투자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는 설문 결과도 있고, 가장 큰 투자 장애물이 노사 문제와 각종 규제라고 응답했다는 조사도 있다.

어제 본지 조사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달 "기업의 기를 살리기 위한 조치를 과감히 하겠다" 며 발표했던 기업규제 완화조치에 대해 30대 그룹 중 5대 그룹만 '약간 만족한다' 고 응답, 정부의 기대와 달리 기업의 기를 살리는 데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자본과 노동의 이동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기업들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 를 골라 사업을 하는 것이 일반화할 것이다. 미국이 기업의 법인세 완전 폐지를 검토하는 등 세계 각국이 기업 경영환경 개선에 적극 나서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우리나라 역시 외환위기 직후 6천여건의 규제를 없애고 '원 스톱 민원 처리실' 을 만드는 등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크게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단기적 수치 목표 달성에 초점을 둔 것" 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비판도 있고, '원 스톱' 은커녕 공장 하나 완공하는 데 관청을 1백번 오가야 하는 현실이 아직도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부는 그동안 우리가 누차 지적한 대로 기업 경영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는 기업을 불신하는 듯한 자세에서 벗어나 '기업 신뢰' 의 바탕 위에서 기업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규제는 최소화해야 한다. 노동 문제와 관련해서도 정부는 노동시장을 최대한 유연하도록 만들고 그에 따른 실업 등의 고통은 사회복지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철저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감원은 안된다는 식의 어정쩡한 모습은 버리고, 노사 분규는 노사간의 자율적인 대화에 맡기되 불법 파업엔 단호한 공권력의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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