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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쭉쭉빵빵'의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최고 97㎏을 기록했던 몸무게가 64㎏으로 대변신. 텔레비전을 통해 '살아, 살아, 내 살들아' 를 외치던 주인공이 균형 잡힌 몸매를 선보이는 순간 시청자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누구에게나 '나도 날씬한 몸매를 가질 수 있다' 는 꿈을 심어준 '이영자 신화' 는 그러나 전신에 걸쳐 세차례 지방흡입 수술을 했다는 그의 고백과 함께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식사량은 절반, 밀가루 음식은 안먹기를 실천하며 매일 7㎞씩 걷거나 달렸다는 '비법' 의 마력은 사라졌지만 '이영자 효과' 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여성들은 달리기와 얼굴 밴드 구입에 나서는 대신 지방흡입술을 문의하거나 수술하려고 성형외과로 몰려들고 있다. 영락없는 '이영자 특수' 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각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이 매력적인 몸매를 얻기 위해 '눈물의 다이어트' 를 한다. 사과.포도 등 한 가지만 먹는 원 푸드 다이어트, 동물성 순살코기만 먹는 황제 다이어트에 저녁 식사 거르기, 오후 6시 이후 금식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설마 하면서도 손가락 한 마디에 밴드를 감고서 신체의 특정 부위의 살이 빠지기를 고대하고, 특수제작한 랩으로 몸을 감으면 체온이 낮아져 체중이 줄어든다는 래핑 관리 업소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훌라후프.에어로빅.달리기.아령 체조…. 살 빼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일단 나서고 본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어떤 방법이든 상당 기간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다이어트 방법도 성격 나름이라며 B형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법(음식은 골고루, 운동도 다양하게)을, O형은 단기집중으로 확실하게 성과를 올리는 방법(살코기를 위주로, 목표를 정해가며 하기)을 써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혈액형 다이어트까지 등장했을까.

공개하고 싶지 않은 비밀 1호가 나이보다 몸무게일 만큼 여성에게 몸매는 스트레스 덩어리다. 국내 한 회사가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몸매 관심도' 조사에서도 10명 중 7명 꼴로 몸매나 체중조절을 원할 정도다.

몸매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거의 열배나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오는 판이다. 영국 글래스고 대학 연구팀은 전문직도 예외가 아니어서 같은 직장동료 가운데 자신이 뚱뚱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대학에 종사하는 여성은 남성의 약 세배, 은행 여직원들은 남성의 약 열배나 된다고 보고했다. 물론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무엇 때문에 여성은 스스로 불행해지며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미인=말라깽이' 라는 여성의 고정관념과 사회적 압력에서 찾는다. 그 중에서도 진짜 문제는 사회적 압력이다. 여성의 고정관념 또한 사회적 압력을 통해 확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몸매 관심도 조사에 응답한 여사원들이 연령에 관계없이 비만의 가장 큰 문제로 대인관계 장애(37%)를 꼽고 있으며 건강 악영향(34.8%), 다음으로 사회적 편견(20.7%)을 들고 있다는 사실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이 얼마나 큰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여성기금이 공모한 '딸들의 이야기' 최우수작으로 뽑힌 수기는 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을 이겨내려고 일류대에 진학했지만 소개팅은 물론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외모로 좌우되자 결국 다이어트 등 몸매 가꾸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체중감량 방법을 둘러싸고 성형외과 의사와 개그우먼 이영자씨간에 벌어진 이번 사건의 본질은 돈과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내면엔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숨어 있다. 늘씬하면서 볼륨감이 넘치는 이른바 '쭉쭉빵빵' 이라야만 한다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등에 업고 여성의 상품화가 이뤄진 것이다.

여성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차 척도가 몸매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말라깽이가 되는 것은 건강을 해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갖 고담준론(高談峻論)에 지나지 않는다.

40대 중반을 넘긴 제인 폰다가 날씬한 몸매를 과시하며 에어로빅 비법을 소개한 '워크 아웃' 으로 떼돈을 번 지 어언 십수년. 한국도 인기 여성연예인의 몸매관리법이 곧 돈이 되는 사회로 들어섰다. 아마도 지금 어디에선가 또다른 '이영자 신화' 가 진행되고 있지 않으려나.

홍은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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